친구는 피로가 낳은 무기력을 극복하는 일로 이사를 권했다. 그렇다. 이사.
다른 곳에서의 삶은 노상 내가 꾸는 꿈이다. 꿈으로 남는 이유는 꾸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사가 두려워지는 때가 온 것이다. 역할이 늘어나면서 나는 삶의 거처를 옮기는 것이 두려워졌다. 아이들 학교, 그게 가장 큰 이유가 되었지만, 지금까지 꾸려온 이곳에서의 삶을 다른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하다못해 정수기 설치 전화를 거는 것도 귀찮은 일이 되어버린 지금에 이사라니.
한참, 서촌 그러니까 경복궁 옆 동네로 이사를 꿈꿨다. 엄밀히 말하면 자하문 터널을 지나 부암동 꼭대기. 드라마의 영향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커피 프린스란 드라마를 보고 나서 나는 한참 부암동 그 동네에 살고 싶었다. 산이 보이는 마당이 갖고 싶었던 게 더 크기도 했을 것이다. 강의 북쪽 동네, 궁을 사이에 둔 동네가 주는 고즈넉함을 좋아했다. 도심의 높은 빌딩들 사이에 단층의 지붕을 이고 있는 동네가 주는 여유가 좋았다. 그러다 어느 날 친구가 서촌으로 이사를 했다. 작은 마당이 있는 한옥이었는데, 겨울에는 말도 못 하게 춥다고 온 몸을 감싸 안고 말했지만, 봄, 여름, 가을볕의 마당을 친구도 나도 알고 있었다. 그게 몹시도 부러워 나도 서촌으로 이사를 가야겠다 마음먹었지만, 무서운 집값과 아이의 학교와 남편의 회사 등등 고려할 것이 많아 선뜻 자리를 옮길 수 없었다.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날이면 그래, 뭐 우리 동네도 얼마나 좋은데, 하며 스스로 위안했고 또 마당을 그리워했다.
어릴 적부터 자주 이사를 다녔다. 동네에서 동네로, 옆집에서 앞집으로 주인이 나가라면 나가야 하는 세입자 신세의 부모님은 언제나 내 집을 가져보나, 같은 말을 하며 짐을 꾸렸다. 그러다 정말 우리 집을 갖게 된 날이 오긴 했다. 비록 몇 년 살지 못했지만, 이사 걱정 없이 누구와 한 대문을 쓰지 않는 우리 집이었다. 작지만 내 방도 있었고, 엄마는 식탁도 가졌다. 그리고 또다시 이사. 그 집 이후 몇 번의 이사를 거듭했는지 세기도 힘들다. 이사가 잦은 어린 시절 덕분에 동네 친구가 없었다. 그렇게 유년을 보내고, 스무 살도 넘어 이 동네로 이사를 했다. 이 동네에 오래 살 거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이십여 년이 다 되어간다. 나의 반평생을 함께 한 동네. 얼추 고향이 된 셈이다. 동네에서 성당을 다니고, 동네 친구들을 사귀게 된 것이 가장 즐거운 기억이다. 결혼을 했고, 여전히 동네에 남았다. 중간에 분가를 하면서 2년 정도 다른 곳에서 산 적을 제외하고 나는 주로 이 곳에 머물렀다. 머물면서 정이 들었고, 정을 주었다. 아이들은 여기가 고향이 되었다. 우리에게 이사라는 새로운 경험, 다른 동네 다른 터전으로의 이주가 과연 일어날까. 지금으로서는 아니, 라는 대답이다.
하지만, 살고 싶은 동네는 늘 있다. 좋아하는 동네들. 연희동, 망원동, 부암동, 효자동, 성북동 이런 곳들. 고등학생 시절 서울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 준 동네들이 여전히 그립다. 남편과 나는 이 동네들을 산책할 때마다 부동산을 기웃거리곤 하는데, 둘 다 떠날 마음도 없으면서 얼마나 신 포도인지 구경이나 해보자는 심정으로 전세니 매매니 하는 문구들을 들여다본다.
골목길이 이어지는 동네에 살고 싶다. 모퉁이를 돌면 또 다른 골목이 이어지고 책방, 빵집, 치킨집, 반찬가게가 나란히 마주 보고, 전봇대 위로 굵은 전선이 이야기를 이어주는 골목길 동네. 잘 계획된 도시인 지금 동네에도 골목은 있지만, 집과 골목마저도 계획된 곳이어서 걷는 맛이 덜하다. 이사를 한다면 골목이 있는 곳으로. 이야기가 많은 곳으로.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