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 중 두 명은 겪어봤다는 오미크론의 유행에 절대 편승할 수 없을 줄 알았다. 유행 따라 사는 사람들은 아니니까, 라는 근거 없는 자부심이 있었고 그럭저럭 그 유행도 끝자락으로 향한다 믿었던 것도 있다. 해서 처음엔 설마, 그러다 역시가 되어버린 2주의 자택치료 기간을 나 역시도 보냈다. (가족 간의 릴레이 감염,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었던 것이었던...) 아, 봄맞이 달리기 다시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렇다. 춘분을 지나며 달리기를 재개했다. 겨우 내 얼었던 몸이 풀리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그럭저럭 또 달리다 보면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했고, 무엇보다 벚꽃 나무 아래에서 뛰어보고 싶었다. 흩날리는 벚꽃을 맞으며 달리는 기분은 어떨까. 그 생각을 하며 굳었던 발목과 고관절, 무릎의 근육을 풀어주던 며칠이었다.
그러나 역시 인생은 알 수 없고, 코로나 대유행에 뒤늦게 합류하여 어느 해보다 짧게 피고 사라진 벚꽃 주간에 바깥출입은커녕 집안에서도 겨우 운신할 정도로 내상을 입고 말았다. 격리 해제되고 나가보니 벚꽃 나무에는 언제 꽃이 있었나 싶게 초록이 짙어 한 계절을 몽땅 잃은 기분이었다.
달리기를 좋아하게 된 건, 그 안에 담긴 고유의 시간과 공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된 후부터였다. 숨이 찬 나의 폐도, 그래서 멈추고 싶어 하는 마음도 그 시간 속에 있지만 달리는 동안 필름처럼 스쳐가는 각각의 풍경과 그때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 또한 내가 누리는 것이다. 이렇게 완전히 혼자, 모든 것을 느끼고 보고 들을 수 있다니. 누구와도 공유가 불가능해서 안타깝기까지 한 소유다. 물건처럼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더욱 아름다운 찰나가 이어진다. 누렇게 말라있는 것만 같은 땅에서 초록의 풀이 길고도 곧게 자라 바람과 함께 움직이는 천변 길에서, 버드나무 가지가 매일의 초록을 성실히 싹 틔우는 곳을 지나 산수유 꽃이 노란 점으로 몽글몽글 뭉쳐있고, 보라색과 흰색의 제비꽃과 봄까치 꽃이 내려앉은 굴다리까지 뛸 때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번이 흘러나오면,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고개를 조금 들어 푸른색 하늘을 올려다보면, 아 이곳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나 온전히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무엇이 되어 기억에 새겨진다.
그리하여, 그 기억이 다시 달리기를 할 수 있는 마음을 먹게 하고 갖고 싶으나 갖지 못하는 마음을 알게 하고 머물고 싶으나 머물 수 없는 순간을 깨닫게 하여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뛰게 한다. 어제의 벚꽃은 사라졌으나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 것처럼, 나는 조금 더 많이 사라질 순간을 모아 존재의 기억을 깨울 돌멩이들을 채워보기로 한다. 주머니 속에 넣어 둔 하나의 돌멩이는 소리를 내지 못하지만, 여럿이 모이면 또 다른 일을 벌일 수 있으니.
마침, 오늘은 곡우였다. 한 해 농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볍씨를 담근다는 곡우. 처음으로 돌아간다. 솔가지로 덮어둔 볍씨 가마니를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처럼. 나도 그렇게, 순간을 모아 가마니에 넣어둔다. 올 한 해 어떤 싹을 틔우고 얼마큼의 수확을 할지 가늠은 어렵지만 모아둬야 뿌릴 일도 생기는 법이고 봄은 가도 여름은 오니까, 벚꽃은 져도 라일락은 활짝이니까. 곡우라니,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