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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Jan 06. 2022

2019년 10월의 고백,  

내가 사랑하는 이들


0.


그를 언제부터 좋아했는지에 대해 떠올려본다. 아, 아주 오래 전의 일 같아 처음을 떠올릴 수 없다. 그를 좋아하는 것은 절로 나이를 먹는 것처럼, 혹은 숨을 쉬고 밥을 먹고 길을 걷고 책을 읽거나, 매일 커피를 찾아 마시는 일 같은 삶이 되었다. 그러니까 가끔 누군가 묻는데, 왜 그를 좋아하는지에 대해. 그럴 때면 나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웃는다.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그와 함께 한 많은 순간들, 생의 지점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1.


월요일은 대체로 아무 일정이 없다. 미술관, 박물관, 도서관도 쉬는 월요일. 월요일의 대공원은 전 날의 북적임, 혼잡, 들뜸의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텅 빈 리프트가 줄 지어 올라가는 아래로 드문드문 보이는 등산객들, 오늘은 휴관일이라 푯말을 걸어 둔 미술관. 산책을 해 볼까 하다 월요일의 대공원을 그려보곤 이내 생각을 접는다.


부산하게 식판과 알림장을 챙겨 아이를 어린이집에 내려 주고 오는 길에 한살림에 들러 이것저것 장을 봐 왔지만, 의욕적으로 뭔가 만들어 먹겠다는 계획은 없다. 적어도 오늘은 나도 휴일. 돌리다 만 청소기를 들어 대충 먼지를 치우고, 선반이며 서랍장 위의 먼지를 한참 응시한다. 내일은 혹은 모레는 치워줄게. 기다려. 월요일, 소파에 가만히 누워 나른하게 들어오는 마지막 가을볕을 받는다.



‘이 세상에서 별빛이 가장 많은 곳이 어딘지 아세요?

물론 나는 모른다. 아는 게 많지 않다.
‘페루의 티티카카 호수에 가면 섬이 있어요. 그 섬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어요. 너무 환해서 잠을 못 잤어요.’

(김연수, 여행할 권리 중에서)



부유하는 먼지들이 아래로, 햇볕에 나풀거리는 먼지 조각들이 마치 눈 같다. 눈이 부셔, 잠이 들 수 없다.


2.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나온 달력을 넘겼다. 6월의 그림은 방병상 작가의 사진이다. 여름의 저녁, 그리고 약간은 무기력한 여름. 며칠쯤 비가 계속 내렸으면 좋겠을 만큼 건조한 기분이다.


주말에 드라마를 봤다. 한없이 약하고 곧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움을 감추기 위해 강한 척 센 척, 괜찮은 척하는 모습의 찌질한 주인공이 화면에 속에 있었다. 그는 그 때문에 결국 상대를 울리고 고생시키는데 실상 가장 큰 내상을 입는 것은  자신이다. 그리고 운다. 울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말하며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눈물을 쏟는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 친구 중에서)


그를 세상으로 끌어낸 것은 어쩌지 못하는 그리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르지만’, 그를 찾아내고 손을 내민 상대에게서 발견한 삶의 희망이었다.


습기 없이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고, 강렬한 햇살을 피해 그늘 아래 들어서면 천국과 같은 기분을 느끼는 여름날을 좋아한다. 그런 여름인데, 절망스러운 시국이라 밖으로 발을 내딛지 못한다고 핑계를 댄다. 그럴 기분이 나지 않는다고, 사막처럼 건조한 마음에 불어오는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얼음이 다 녹아 차갑지도 시원하지도 않은 애매한 온도의 아이스커피 같은 기분이랄까. 이렇게 내 여름날이 녹아버리는 것인가 하는 순간 그가 말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래, 맥주 캔을 따고 발등만 덮는 샌들을 꿰어 찬다. 아직은 바람이 시원하다.


3.


'더 많은 이야기. 이제 내게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살아 있는 다른 사람의 체취가 그리워서 잠도 안 온다.'

( 김연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중에서)


세상이 다 내게 등 돌린 것 같은 날, 난 가회동 어느 모퉁이의 돌계단에 앉아 있는 상상을 한다. 오래된 돌과 오래된 나무가 있는 동네. 아주아주 오래된 것들이 조금씩 남아 있는 동네에 앉아서 다, 별거 아니란 이야기를 듣는 상상.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는, 죽고 못 사는 사랑도, 죽을 것 같은 이별도, 진짜 죽으려 했던 절망의 순간도 다 별 거 아니라는 이야기. 결국 사는 건 그런 지리하고 지난한 시간을 버티고 보내고 지나면서 만들어진 반짝이는 조각들이 군데군데 빛을 내는 그런 누더기 같은 조각보라는 걸.


신사동 골목길에서 얽힌 전선줄을 타고 가는 이야기를 듣는다. 누구네 둘째가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 어느 집 아빠가 오늘 야근을 하고, 아무개가 이혼을 하고, 아직 취직을 못한 막내를 걱정하는 이야기와 어느 해 누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야기들을.


‘록펠러대학의 세포 생물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귄터 블로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생명의 연속성이라는 점에서 보면 스무 살이라느니, 서른 살이라느니, 마흔 살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들의 나이는 35억 살입니다.” 또 다른 과학자인 스탠리 밀러는 자연적으로 아미노산이 생명체로 바뀌는 데 걸리는 시간을 이렇게 추측하더군요. “10년은 너무 짧을 테니 100년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1만 년이나 10만 년도 괜찮을 것 같군요.” 시간이라는 게 뭔가요? 나이라는 것은 또 뭐구요? 10만 년 정도 산다면 살만큼 살았다고 말할 수 있나요? 지금, 35억 살 앞에서?’

(김연수, ‘우리가 보낸 순간 <시>’ 중에서)


그러니까 내가 지금 35억 살인데 말야, 별 거 아니다.


4.


에, 또... 그러니까 나는 지금 35억 년째 그를 좋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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