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가 되지 않겠단 마음

시간의 위로

by 산책

치킨 게임이라는 게 있다. 두 대의 차가 마주 보며 달리다 어느 한쪽이 핸들을 틀면 지는 게임. 어느 순간 방향을 틀지 않으면 충돌하고 마는, 끝을 봐야 끝이 나는 게임.

삶은 시시 때때로 방향을 튼다. 급커브 구간처럼 갑작스럽게 방향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씩 눈치 채지 못할 만큼 각도를 틀어 어느 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장애물을 마주하게 된다. 붙잡은 핸들을 놓을 것인지, 부딪히지 않게 반대 방향으로 돌릴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 마치 치킨 게임 같은 그때.

어느 날 그런 물음을 받았다. 살면서 가장 큰 용기를 필요로 했던 적이 언제였는지. 가장 크게 용기를 낸 때라면 인생에 있어 방향이 틀어지는 지점, 정면으로 부딪힐 것인가 혹은 핸들을 꺾을 것인가 망설인 지점이 될 텐데 딱히 생각나는 순간이 없었다. 어쩌면 단 한 번도 용기를 내지 못했던 걸까, 그냥 그렇게 적당히 핸들을 좌우로 틀면서 길을 벗어나지 않게만 살아 온 건 아닐까. 그러기엔 좀 밋밋하니까 기억의 저편을 더듬어 뭐든 끌어 내 보기로 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자 여덟 살 무렵, 밤이면 옷장 안에서 귀신이 나올까 두렵고 이불 저편에서 불쑥 손이 튀어 나올까 무서워 발끝부터 어깨 까지 이불을 꼭 덥고 자던 때, 생애 첫 밤길 심부름 '사건'이 떠올랐다. 가로등의 그림자가 유령 같아 뒤도 못 돌아보고 슈퍼 문을 나와 헉헉 거리며 집 까지 한달음에 뛰었던 밤길의 어린아이. 거스름돈을 쥔 손이 흠뻑 젖을 만큼 긴장했던 그때,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두려움에게 들으라는 듯 흥분한 목소리로 '다녀왔습니다!' 외쳤던 여덟 살 꼬마. 아마 최초의 치킨 게임일 것이다. 어둠과 귀신,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핸들을 틀 것인가 아니면 부딪힐 것인가, 물론 여덟 살 꼬마가 이렇게 거창하게 생각하고 행동한 것은 분명 아니었을 테지만 어쨌든 넘어야 할 장애물이었고 과정이었을 테니까. (상상이 가능하지 않나, 그 또래 꼬마들 사이에서는 허세와 자랑이 대화의 주를 이루니까 다음 날 학교 가서 말할 거리가 생긴 것이다. '야! 나 어제 깜깜한 밤에 심부름 갔다 왔어!'라고 외치는 모습이.)

지구와 충돌하는 행성을 향해 인류를 대표해 출격해야 하는 운명은 아니어도, 사소하지만 필요한 용기를 내야 할 때가 있다. 치킨 게임이라고 의식하는 건 아니지만, 삶이란 거대한 실체 앞에서 가끔은 으름 짱을 놔야 하는 때가 말이다. 이번엔 나도 핸들을 틀지 않을 거야. 여덟 살 꼬마가 짧은 골목길을 뛰어가며 '무섭지 않아! 귀신 따윈 없어!'라고 외치듯이 말이다.


치킨 게임에서의 치킨(chicken)은 겁쟁이를 뜻한다. 불확실한 것에 필요한 건 확신이 아니라 용기다. 적어도 겁쟁이가 되지는 않겠다는 마음 그게 바로 용기가 아닐까. 살면서 가장 큰 용기가 필요한 때는 지금일지도 모른다. 낯선 나라로의 여행, 묵혀 뒀던 스페인어 책, 소파 밑에 박아 둔 체중계, 녹 쓴 자전거 같은 것이 나의 용기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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