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집

시간의 위로

by 산책

온 몸이 덕지덕지 풀을 바른 듯 끈적였다. 한 걸음씩 내 딛을 때마다 습하고 더운 공기가 휘감는 것이 마치 거대한 솜사탕 기계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부풀리는 것이 달콤하고 폭신한 솜사탕 뭉치가 아니라 무겁고 끈적이는 습기라는 점이 달랐지만. 하늘 역시 무게를 못 이기고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비가 쏟아졌으면. 한바탕 내리고 나면 모든 것이 가벼워질 것 같은데 비는 좀처럼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에게서 완전히 등 돌린 애인의 뒤통수 같은 하늘. 아무리 애원한다고 한들 돌아오지 않을 그의 뒷모습 같은 하늘 이었다. 샤워를 하고 에어컨을 틀고 아이스커피를 연거푸 두 잔째 마셔도 몸속 열기는 가벼워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의 습도는 점점 높아지고 여기에 뭐라도 하나 툭 얹으면 그대로 넘쳐흐를 것 같은 여름날이다.

여름이 유독 힘든 건, 겨울 태생이기 때문일까. 자궁 속에서 심장만 뛰던 콩 알 만 한 태아가 점차 사람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 때가 여름이었을 것이다. 그때쯤 나를 품고 있던 엄마의 입덧은 위액까지 토해 낼 만큼 한창이었을 거다. 그랬던 자궁 속 기억이 세포 어딘가에 남아서 여름이 오면 자연스레 용을 쓰나보다. 살아 보라고, 버텨 보라고, 곧 좋은 계절이 올 거라고.


꺼져 버린 소파 스프링처럼 쉽게 튀어 올라 올 것 같지 않은 기분을 바꿔 보고 싶었다. 마음의 제습기를 가동할 때가 되었다. 좋은 계절을 맞이하기 위해서 꽃단장은 못하더라도 머리는 감아야지. 뼈마디 마디까지 습기가 가득 들어 차 몸을 움직이기 쉽지 않지만, 내가 기댈 곳은 '시간' 뿐이니 이번에도 역시 '시간'에 의지해 보기로 한다. 흘러가는 시간과 저장된 시간 중에 저장된 시간을 선택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장된 ‘기억’이지만.



"어? 이거 전에 없던 건데 새로 생겼나 봐."


반 지하의 커피 집. 바뀐 메뉴판과 쇼 케이스를 보면서, 기억 속에 사진 한 장의 프레임으로 남아 있는 마지막 방문 기록을 들춰 본다. 못 보던 메뉴가 생겼다. 커피콩을 고를 수 있게 되었고 가격도 올랐다. 그러나 사람들과 메뉴판은 바뀌었어도 익숙한 공기가 남아있었다. 두세 개의 계단을 내려가 자주 앉던 자리가 비었는지 확인했다. 여닫이창이 달린 벽을 따라 나란히 놓인 기다란 테이블 앞, 허리 보다 높은 키의 동그란 의자에 앉았다. 1층과 지층의 중간 높이인 가게에서 이 자리에 앉으면, 바깥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다리가 보인다.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자면 창 안의 시간은 느리게, 창밖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아 부자가 된 기분이 든다. 잠깐의 휴식이 휴가지에서의 그것만큼 농도가 짙어진다. 이따금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찾았던 커피 가게에 들러 익숙한 메뉴를 고르고 어느 해 여름의 그 날처럼 앉아 있었다. 비록 옆 자리의 그 사람이 그때의 그 사람은 아니어도, 변함없는 맛과 변함없는 자리가 있으니까 절반은 괜찮다. 그간 이 장소에서 이 자리와 나누었던 시간이 어깨를 두드려 준다.


'기억도 업데이트가 필요해. 가끔 들러.'


주인과 눈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지 않아도 단골이 될 수 있다. 그곳에 마음을 쓸 '시간'만 충분하다면 말이다. 가게가 내 뿜는 분위기와 맛이 처음의 생경함, 신선함과 딱 들어맞는 느낌이 들면 곧 단골 할 자세를 취한다. 자주는 못 가더라도 그 동네에 가면 그 집에 들른다. 그리고 적어도 세 번은 가보는 걸로 혼자만의 규칙을 정한다. 처음의 설렘이 두 번째 낯익음, 세 번째 익숙함으로 바뀌면 이제 여기는 내 단골집이다. 이것은 오직 '시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두 번째나 세 번째 과정에서 틀어지는 건 가게의 문제이지 '시간'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렇게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결이 공고해 지면 오랜만의 그곳이 설령 예전의 그 느낌이 아니라 해도 한두 번쯤은 눈감아 줄 여유가 생긴다. 기억이 업데이트되는 순간은 그런 때이다. 익숙함과 궤도를 달리 한 사소한 변화들을 감지할 때.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앞서 시간이 보답한다. 이곳에서 나눴던 이야기, 웃음, 슬픔, 너의 꿈과 나의 바람. 우리가 만든 시간이 오늘처럼 습기 많은 날, 수도꼭지를 어느 쪽으로 돌려야 할지 몰라 잔뜩 머금고만 있는 때에 속삭인다. 다 지나 간다고, 곧 좋은 계절이 올 거라고, 그때처럼 잘 견디다 다시 그때처럼 찾아오라고. 그 날도 오늘처럼 촘촘한 우유 거품의 쫀득한 아이스 라테를 마시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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