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위로
새 구두를 꺼내 신었다. 남색 빛깔의 둥근 코가 반질거리는 구두였다. 전부터 한번 신어보고 싶었던 디자인이었고, 좋은 기회에 내 것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선뜻 꺼내 신기가 어려워 신발장에 자리한 지 몇 주 만에 밖으로 나왔다. 신고 갈 적당한 곳이 없단 이유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길들이지 않은 새 신발을 신었을 때의 고통이 두려워서였다. 발등이 유난히 높은 편이라 새 신발을 신으면 엄지발가락부터 그 위의 발등까지 붓거나 살갗이 벗겨지기도 하고 뒤꿈치의 상처는 필수. 그리고 하루 종일 피로할 다리를 생각하니 쉽게 새것에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그 구두를 신을 마음을 먹은 건 특별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구두를 선물해 주신 분과 만나기로 한 것이다. 선물 받은 신발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새 신을 신고 나설 두려움을 앞섰다.
조심스럽게 발을 밀어 넣고 또각또각 첫걸음을 걸어봤다. 보도블록에 닿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네, 라는 안도하며 지하철에 올랐다.
'저 오늘 이거 신고 왔어요!'
'잘 어울리네. 다행이다!'
하천을 따라 창문을 활짝 열어 둔 한 노천카페 테이블 아래에서 나는 발을 들어 보였다. 반짝이는 새 신발 속에는 어색하게 그리고 조금 불편하게 감춰둔 발이 있었다. 점점 발등이 조여 오고 있었다. 길들여지지 않은 새 신 속에서 발이 붓고 있었다. 돌아와 신을 벗으니 역시 예상은 틀리지 않았고 발등은 상처가 이미 여럿 나 있었다. 욱신거리는 발목을 까닥거리다 그냥 신던 운동화나 계속 신을까 싶었다.
신발을 길들이는 일. 나처럼 조금 특별한 발을 가진 사람에게는 시간과 노력뿐만 아니라 고통이 동반되는 일이다. 새 신과 아치형 발등이 서로 친숙해지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신발장에서 그 신을 꺼내 신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 걸릴 시간과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새 신을 길들이는 걸 꺼려한다. 나이를 먹게 되면서 경험치가 쌓이고 그러다 보면 두려움도 더 커지게 되는 것을 새 신발 하나 꺼내 신는 것에서도 느낀다. 그러나 또 알고 있다. 불편함, 고통, 어려움을 겪지 않고 돌아가는 길은 없다는 것을. 결국 부딪혀야 하며 결국 견뎌야 하고 결국 이겨내거나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을.
어떤 식의 글을 쓰고 싶은가, 어떻게 글을 쓰며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깊이 들어가면 고통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으며 그래서 그 언저리만 맴돌고 있는 나 자신의 뒤통수를 똑바로 지켜보고 있었다. 세상이 다 내게서 등을 돌린 것 같은 날, 바싹 볶아 버려 졸아든 주꾸미처럼 쭈글쭈글해진 자존감 앞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그 뒤통수를 보고 있던 며칠이었다. 그리고 오늘, 새 신발을 신고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고 버스를 타고 길을 걷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뒤통수를 돌려세웠다. 맨 얼굴로, 어쨌든 걸어가고 싶다면 맨 얼굴로 가자고. 두렵겠지만, 익숙해지면 두려움도 불편함도 고통도 어려움도 일상이 될 거라고. 길들여진 신발에 어렵지 않게 손을 내밀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