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의 의미

시간의 위로

by 산책

한 낮이었다. 비가 온 다음 날이었고 하늘은 작은 먼지 하나 날리지 않을 만큼 반짝였다. 잘 닦인 유리창 같은 파란 하늘이 메타세쿼이어 나무 기둥 사이로 뻗어 있었다.


‘이 길,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정말 잘 만든 것 같아.’


나무의 키를 따라 가보면 하늘이 소실점인 길. 차 창문을 열고 바짝 갠 날의 바삭한 공기를 킁킁 거렸다.


‘어쩌면 누가 만든 게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됐는지도 모르지.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게 의미가 있는 건 아니라고.’


나의 감탄을 엄지로 꾹 눌러 버리는 그의 말에 '흥!' 하고 코웃음을 치긴 했지만 마지막 초록 기둥에 다다를 쯤엔 ‘정말 그런가?’ 싶었다.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애썼다. 이게 내 인생의 사인(sign)이 아닐까, 순간순간 마주친 기회를 이리저리 재보곤 했다. 모든 일에는 절대자의 섭리가 존재하는 게 아닐까, 그의 말이 혹은 그녀의 제안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지는 않을까, 신은 그런 모습으로 실재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바쁜 아침 뛰어나가 잡은 엘레베이터가 마침 같은 층에 서 있을 때, 지하철 승강장에 내려서자마자 들어서는 지하철 불빛, 그렇게 하루 동안 이리저리 마주친 우연을 행운의 징표로 받아들이는 것부터, 무심코 연 메일에서 본 공모전 광고, 술 취한 후배가 확신에 차 쏟아 낸 말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찾고자 했던 것들. 그러나 실은 그가 한 말처럼 대부분의 일에는 특별한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어떤 일에 의미를 부여했던 건 용기를 얻기 위해서였다. 결정에 있어 필요한 용기, 꿈에 대한 지지, 불확실한 미래를 잠재우기 위한 확신 같은 것이 필요해서 말이다.


알고 보니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았다. 생일이 같았고, 전화 번호 끝자리가 같았다. 형제 관계가 같았고, 좋아하는 영화가 같았다. 같은 날 같은 공연장에 있었던 적도 있었고, 메고 다니는 가방 색이 같았다. 그렇게 찾아낸 우연의 일치를 '천생 연분의 징표'로 삼았던 연애의 처음처럼 세상 모든 것에 둘 만의 의미를 부여했던 그때. 우리는 알 수 없는 미래의 시간을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러 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별 후, 의미를 두었던 모든 것을 엄지손가락으로 싹싹 지워나가게 될 미래를.

사랑이 끝나고 나니 남은 것은 사랑했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어떤 것도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변한 마음 뒤에 남은 것은 변치 않는 사실, 우리가 서로 사랑했다는 사실, 아니 어쩌면 그 마저도 의심스러운 사실 뿐.

그래도 한 평생 아쉽지 않게 굳이 어떤 한 가지 의미를 찾고 싶다. 여기에 당신과 내가 서 있다는 사실은 어떨까? 나의 인생에서, 그리고 당신의 인생에서 우리가 각자 또 같이 서 있다는 진실, 그게 생이 가진 전부이자 유일한 의미가 된다면 별로 쓸쓸하지도 아쉽지도 않을 것 같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서 아픈 아내를 위해 설렁탕을 사 왔던 김 첨지의 마지막 말을 떠올린다. 운수가 좋을 거라 믿었던 사건들이 결국 더욱더 큰 슬픔으로 다가왔던 그의 마지막 외침을.

결국 그렇게 의미만을 부여하고 의미만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앞에 두고도 못 먹는, 시작도 할 수 없는 자리에 서 있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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