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거나

시간의 위로

by 산책

첫 문장을 고르는 것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간 익숙한 곳에서 떠오르는 대로 써 내려갔던 것과 달리 새로운 곳에서의 처음은 어렵다. 뭔가를 쓰고 싶어 산 노트가 있었다. 새하얀 노트의 첫 장에 뭘 써야 할까 몇 번을 펼쳤다가 결국엔 덮고 말아 버렸다. 의욕에 넘쳐 두근 거렸던 그 처음의 시간 또한. 그리고 그렇게 쌓여간 몇 권의 노트 역시 그렇게.


어느 해 생일에 만년필을 선물 받았다. 기쁜 마음으로 잉크를 채워 넣었고 한 병의 잉크를 다 쓸 때 까지 뭔가를 써보자고 결심했다. 그러나 결심은 그 자체로 완전하기에, 뭐니 뭐니 해도 계획의 아름다움은 마음먹기 그 자체란 변명을 하며 마땅한 노트가 없다는 핑계로, 특별한 뭔가를 쓸 일이 없다는 이유로 처음 선물 받은 상태 그대로 지금도 하얀색 헝겊 필통 안에 돌돌 말아져 있다.


'점심 뭐 먹을래?' '아무거나. 맛있는 거 뭐 없나?'

'우리 어디 갈까?' '글쎄. 뭐 특별한 거 없을까?'

'주말에 뭐 했어?' '별 일 없었어.'


가끔 가던 맥주 집 안주 중에 '아무거나'라는 메뉴가 있었다. 가장 비싼 안주였고, 내용물은 그 집 주방의 '특별한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보통의 호프집 메뉴 중 스페셜 안주가 그 곳에서는 '아무거나'였던 것이다. 주인은 사람들의 심리를 꿰뚫는 양반이었나 보다. 비록 지금 그 맥주 집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는 어디서 무얼 하든 잘 지낼 것이다. 선택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메뉴를 만들었고 그 대가로 제법 비싼 가격이지만 대체로 많은 이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내 왔으니.

삶에 대한 욕심이 그렇다. 아무거나. 고르기 어렵지만 일단 선택하면 특별한 것이었으면. 마치 같은 가격의 같은 포장 속 내용물만 다른 럭키 백을 눈앞에 둔 것과 같다. 이왕이면 가격 대비 비싼 것들이 들어 있기를 바라는 마음. 내가 원한 그 특별한 것이 있길 바라는 마음. 손해 보기는 싫은 마음 말이다. 밥집을 찾기 전에 검색을 하고, 책을 읽기 전에 리뷰를 보고 타인의 SNS를 보고 구매 버튼을 누르는 마음에는 아무거나 고르고 싶지 않다는 마음 또한 담겨 있다. 창과 방패 같은 모순. 그게 삶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맥주 집 안주가 아니어도 ‘아무거나’의 대가로 얻게 되는 특별한 것이 있다는 사실 또한 삶의 진실이다.


'아무거나 써봐. 빛나는 첫 문장을 발견하는 날이 올 수도 있잖아.'

'정말 쓸 게 없어. 특별한 뭔가가 없다고.'

'일단 아무거나 쓰는 게 중요해. 연필을 들고 노트를 펼쳐.'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으로 아무거나 럭키 백을 골라 든다. 오늘은 방배동 뒷골목 전부터 눈 여겨 봤던 작은 파스타 집에 가보는 게 어때? 검색해 볼까? 아니, 일단 들어가 보자. 맛없으면 다음에 다른 데 가면 되지 뭐.

nothing special에서 something special로 가는 길은 하나다. 계획의 아름다움은 마음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데 있다는 것. 특별한 어떤 것을 찾으려면 우선 눈앞의 럭키 백을 집어 들어야 한다는 것. 헝겊 주머니의 끈을 풀러 만년필을 꺼내 적당한 공책에 한 글자 적어 보는 것. 오늘은 맑음, 오늘은 흐림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아무거나’ 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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