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편지

시간의 위로

by 산책

이 편지를 쓸까 말까 꽤 오랜 시간 망설였습니다. 어쩌면 이 글은 당신에게 보내는 게 아니라 나에게 쓰는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굳이 수신인을 당신으로 할 이유가 없고 문장들은 그저 내 마음에 하나씩 묻어 두면 되지 않을까 했습니다. 그러다 마음을 다시 고쳐먹었어요. 어떤 것들은 꼭 전해져야 하니까요. 이를테면 진심 같은 것.

잘 쓰려고 노력했어요. 미리 노트에 쓰고 지우고 다시 베끼기도 하고 머릿속에서 여러 번 문장을 만들어 이어 붙였죠. 노트북을 켜고 백스페이스를 연발하면서 띄어쓰기 까지 교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다 쓸모없는 일이 됩니다. 이 편지를 보내지 못할 거라면 말이죠. 그렇게 완벽할 필요도 그렇게 꼼꼼할 필요도 없는 거죠. 그래서 다시 한 번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하늘이, 구름이, 나뭇잎이 편지를 보내라고 합니다. 가을이니까요. 어떤 마음이든 전해질수 있는 그런 마법의 계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쓰는 편지와 같습니다. 수취인 불명의 편지. 수신 확인 불가의 편지. 저는 그런 글을 씁니다. 매번 한계에 부딪히고 좌절하고 씁쓸해하죠. 어느 날 읽어 보면 다 거기서 거기 같고, 그 날이 그 날 같은 삶과 다를 바 없는 글.

자, 시간을 돌이켜 볼까요? 지난주 월요일 이 시간, 당신은 뭘 하고 있었나요? 저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공원을 산책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분수의 물 잎 새를 구경했던 것이 어제 이었는지 엊그제 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고 있죠. 주말엔 뭘 할까 궁리하다가 주말이 지나고 나면 다시 월요일, 겨우 화요일, 언제 수요일, 하루만 더 목요일, 와 오늘은 금요일, 다시 뭐하지 토요일, 아니 벌써 일요일. 그러니까 제가 쓴 글들이 그렇다는 겁니다. 반복된 요일의 반복된 일상 같은 단조로움 말이죠. 자기 복제, 매너리즘, 이런 말은 대가들이나 듣는 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저 같이 구독자가 서른 명이(직계 가족 포함입니다) 채 안 되는 사람에게도 해당되더군요. 신은 참 공평하죠. 이렇게 다른 듯 같은 무게를 각자의 어깨에 지워주니 말입니다.

언젠가, 당신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 적 있습니다. 나는 이대로 머물러도 괜찮겠구나. 그곳에 당신이 있어줘서 든 생각입니다. 같은 노래를 부르지만 다른 목소리였던 그 날, 그 밤에. 같은 목소리라고 말하지만 다른 노래였습니다. 그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당신이 거기에 있었다고 밖에는 말이죠. 그날 밤 발전과 변화를 동의어로 놓고 보는 세상에서, 자기 계발의 잣대에서 나는 좀 비켜서도 되지 않겠나 싶었습니다. 늙고 싶지 않다는 게 아니라, 영원히 젊음으로 남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조금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걸음을 옮기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그때 당신에게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쩜, (살이 좀 붙은 걸 빼고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더군요. 세월을 입긴 했지만 (거짓말은 못합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 인 것 같았습니다. 당신이 들려주었던 것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농축되어 있는 기억이었습니다. 나는 눈을 감고 어느 시절을 떠올렸죠. 지나 왔기에 존재하는 시절을 말입니다. 그때는 참 어려웠는데 지나고 나서 보니 별 거 아닌 시절.

같은 시간의 반복이라고 해도 무수히 쌓인 날이 모여 여기, 이렇게 우리가 서 있습니다. 그걸 알려 준 건 그 밤 당신이 불렀던 그 노래였습니다. 불 꺼진 무대 위에서 다른 악기의 개입 없이 오직 한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채워졌던 그때에 나는 알았습니다. 처음 무대에 섰던 때를 복기하듯 온 힘을 다해 공연장을 채우던 그 노래를 들으며, 우리는 모두 다 기억할 수 없는 시간들을 지나 여기에 서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한 사람이 그토록 마음을 다해 부르는 노래는 결국 우리라는 것을 말이죠. 그러니 이렇게 흘러가는 듯 보여도 어딘가에 남아서 내가 되고 당신이 되고 우리가 되어 멜로디가 만들어진다는 것을요. 단조로움은 노래가 되었고, 글이 되었습니다.

고마움을 전합니다. 알 수 없는 힘이 되어 준, 그 노래들에. 그 노래를 잊지 않게 해 준 당신에게.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을 이어갈 우리에게.


- 2015년. 10월

매거진의 이전글아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