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위로
카페 앞을 지나는데 크리스마스 캐롤이 나오고 있었다. 시월에는 왠지 가을과의 의리상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면 안 될 것 같았는데, 십일월이 되고 차갑다 못해 추워진 공기에 크리스마스가 어색하지 않게 됐다. 크리스마스는 공식처럼 달콤함이 넘치는 음료들과 사은품으로 주는 다이어리를 받는 것으로 기다리게 됐다. 그러니 저러니 해도 다이어리 몇 장 못 채울 게 뻔 하지만. 빡빡할 만큼의 일정이 없는 탓도 있겠고, 스마트 폰이 그 모든 것을 대신하는 탓도 있으나 나는 대체로 적지 않고 기억하려는 쪽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억을 다 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면 다시 적어야지 하다가 메모하겠다는 것 마저 까먹는다. 어깨의 힘을 풀어야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야지 그런 사소한 몸가짐마저 의식하지 않으면 다시 거북목과 굽은 등으로 뚫어지게 뭔가를 보거나 하고 있다가 등에 통증이 느껴질 때 쯤, 아 다시 몸을 좀 펴야지 하는 것과 같다. 다 까먹어 버리고 잊어버리고 있다가 적어놓을 걸 그랬지 한다.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 가방을 챙기며 책, 지갑, 이어폰 등을 넣고 나서 망설인다. 다이어리를 집어 들었다 내려놓는다. 넣자니 어깨가 무겁고 안 넣자니 마음이 무겁다. 모든 게 자세가 원인인 것은 알지만 어깨가 좋지 않고 가방을 무겁게 매고 다니면 결국 두통으로 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가능한 가볍게 다니려고 하는데, 어깨가 견딜 수 있는 무게의 한계치가 다이어리 한 권으로 결정된다. 넣으면 무겁다. 아, 빼자. 그래도 뭔가 정리가 필요한 날인데. 아, 그럼 다시 넣자. 아니, 저녁 때 정리하지 뭐. 그래, 다시 빼자. 저녁 때 돌아와 다이어리를 펴지 않을 걸 잘 알지만 그렇게 적당히 타협한다. 그래서 오늘도 다이어리는 집에.
월요일에는 동네 문구점에 들러 만년필을 샀다. 삼천 원짜리 만년필. '고객님들의 오랜 기다림에 보답하고자 검정색 소량 입고!' 라고 적혀 있었다. 전에 같은 종류의 만년필을 선물 받았었다. 절정에 채 다다르지 않은 단풍잎처럼 연한 붉은빛이었다. 찰스 부코스키의 시를 옮겨 쓰면 아주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이번에는 문구점 주인이 써 놓은 문구처럼 '검정색'으로 골라왔다. 소량 입고라니 더욱 구미가 당겼다. 한 개 사면 한 개 더 주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는데, '소량, 한정, 시즌 음료' 에 흔들린다. 잠자던 구매욕을 깨우는 알람시계 같은 단어다.
한정판. 기한이 정해져 있는 판매 상품. 이때가 아니면 누리지 못하는 것들, 갖지 못하는 것들. 내일의 미세먼지 습격을 예상할 수 없으므로 오늘의 파란 하늘 또한 한정판이고 밤새 바람이 불고 비가 와 떨어질지 모르는 오늘 낮의 단풍 역시 한정판이고, 한 줄로 들어오다 점차 영역을 넓혀 부드럽고 따뜻하게 들어오는 한낮의 햇살 또한 한정판. 둘러보면 곳곳이 한정판인데도 유독 물건에만 흔들린다. 갖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다. 물건이 갖고 있는 실감 때문일 거다. 어차피 햇살은, 낙엽은 손에 쥘 수 없으니까. 사라져 가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으니까. 만질 수 있는 것만이 주는 만족감, 그리고 확인하는 나의 존재감. 그럼에도 한정판물건이 일깨워 주는 계절감 덕분에, 나는 이렇게 멀쩡히 앉아서 겨울 시즌 음료를 마시고 다이어리를 탐내면서 2016년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귀와 눈과 입으로 느낀다. 한 해 동안 읽은 책과 다닌 곳과 만난 사람들을 떠올린다. 우리 또한 모두 그때 그 날의 한정판이었다는 것을 기억에 새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