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히도 어려운 그 관성의 법칙

by 산책

집안 식구들의 눈치를 보며 (어느 집이나 하나쯤 갖고 있을 법한 애물단지이자) 본래의 역할을 망각하고 빨래 걸이로 전락한 실내 사이클의 먼지를 털어 냈다. 추워서 밖으로 나가기도 싫고 그렇다고 PT를 등록할 여력은 안 되니, 있는 재화를 활용 해보자는 마음에서였다. 곧 계절이 바뀔 테고, 누구나 새해 계획으로 한 번쯤 세우는 그것, 바로 운동을 해 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처음 며칠은 의욕에 넘쳐 힘들어도 지쳐도 탔다. 습관을 들이는 게 힘들지 한 번 습관이 되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독려하며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나자 어느 정도 습관이 된 듯했다. 민족의 큰 명절이자 다이어트의 최대 적인 설 연휴가 끼어 있긴 했지만, 뭐 그런대로 선방하며 운동을 빼먹지는 않았으니 라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설날 아침에도 (식구들의 눈치를 받아가며) 페달을 밟았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황금연휴를 그냥 보낼 수 없어 전부터 계획했던 여행이었다. 그리고 여행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식도락 아니겠는가. 다 아는 맛이라고 되뇌어도 아니 그래도 이건 여기에서만 맛볼 수 있는 여행의 맛이 아니던가, 하는 마음이 불끈 솟아올랐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여행까지 와서, 여기까지 와서 유난 떠는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일상성은 그렇게 무너졌다.

돌아와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기까지 (물론 지금도 진행 중이지만)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때 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런 나의 하소연에 그는 관성을 이야기했다. 뉴턴의 첫 번째 운동 법칙, 그 관성의 법칙 말이다. 외부로부터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물체는 운동을 계속한다는 성질, 그 일관성 있고 뚝심 있는 성질.

다시 말해 외부로부터 힘이 작용한 이후에 물체가 다시 관성의 법칙에 따라 운동을 시작하려면 더 큰 에너지가 필요한 법이라고. 그러니 지금의 괴로움은 당연한 것이고, 다시 (물리적이자 심리적인) 운동의 궤도로 진입하고자 한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운동의 속도를 저해하는 마찰력은 마음속에서도 존재한다. 여지의 개입이다. 관용과 허용, 예외를 적용하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아, 오늘까지만 쉴까? 월요일부터 할까?' '아직 여독도 채 풀리지 않았잖아' '아까 동네 한 바퀴 산책한 걸로 운동한 셈 치면 어때?' 내 안에서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마찰력이 관성으로 돌아가려는 나를 방해한다. 선택이 오로지 나의 몫이기 때문에 더 괴롭고 어렵다. 가장 어려운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 지지 않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본다. 그런데 대체로 매번 지고 말았기 때문에, 쉽게 든 어렵게 든 타협해 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경험치가 일천하다. 그러니 방법을 더 모르겠다. '자고 내일 일찍 일어나서 공부해야지' '9시까지만 놀고' '못 간다고 전화하면 되겠지? 아프다고 해야지' '나는 진짜 몸이 안 좋은 것 같아' 같은 여지에 문을 조금 씩 조금 씩 그러다 대문 활짝 열어젖힌 과거의 기억만 떠오를 뿐이다. 부끄러움도 좌절도 다 내 몫이긴 하지만 어차피 내 몫이니까 나만 알고 끝날,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내 몫들이어서 더 쉽게 관용을 베풀었던 과거의 기억.

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모든 생각을 딛고 다시 페달을 밟는 것. 그 어떤 경험도 충고도 이것을 뛰어넘을 수 없다. 관성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다시 힘을 내 운동 속도를 맞추는 것이다. 마음의 마찰을 무시해야만 운동 궤도 속으로 진입이 가능하다.

물론, 마음의 마찰이 항상 나를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이별 후 지독하게 따라붙는 너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의 관성에는 마찰이 필요하다. 모진 말에 상처받은 기억에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기억에도 실패와 좌절의 기억에도 마음의 마찰력은 유용하다. 나는 그 덕에 그렇게 너를 잊기도 했고, 나는 그래서 이렇게 살기도 하니까.

삶에 있어서 관성의 법칙은 해야 하는 일에 있어서는 쉽게 일어나지 않지만, 그만 두고 싶은 일에 대해서는 쉽게 벗어나기 힘들다. 평생 가도 잊지 못할 그 이름은 뉴턴이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한 도시에서 나이 먹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