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위로
한 도시와 함께 나이 드는 일은 상실의 슬픔과 일상의 기쁨을 몸 안에 축척한다. 사라지는 어떤 것을 발견하고 안타까워하는 일과 여전한 것을 반가워하는 일의 반복.
지어진 지 30년이 훌쩍 넘은 오래된 아파트 단지 옆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축 재건축, 이란 플랜카드가 내 걸린 지 몇 년이 지났고 정말 사라지는 것인지, 언제 사라지는 것인지 지날 때마다 궁금했는데 이제는 텅 비어버린 아파트.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아파트 놀이터에는 아이들의 소리로 가득했던 곳, 식수대에는 빈 페트병에 물을 채워 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던 곳, 좁고 작은 지상 주차장에 옹기종기 공깃돌처럼 자동차가 모여 있던 곳, 열린 창문 사이로 텔레비전 소리가 새어 나오던 곳, 삼겹살, 청국장, 김치찌개 냄새가 풍겨 나오던 곳. 이제는 그곳에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다니 약간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허전하고 공허한 바람이 불었다. 이런저런 이권 관계에 얽혀 입구 쪽 상가는 재건축을 하지 않는다고 큼지막이 써 놨다. 재건축과 관계없이 영업합니다. ㅁ 자 구조의 상가는 큰 길 가에서는 안 보이는 중정이 있다. 바람이 시원한 초여름 저녁에 종종 상가 안 치킨 집에서 맥주를 마셨다. 중정에 펼쳐 놓은 간이 테이블 덕분에 날이 좋은 때는 별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그 옆은 뚝배기가 넘치게 양 많고 맛 좋은 감자탕 집이, 견과류가 콕콕 박힌 찹쌀떡이 유명한 빵집이 있다. 아, 어느 날인가 떡을 사러 갔는데 현금이 없어 돌아 나오자 나중에 달라며 봉지 안에 떡을 쑥 밀어 넣었던, 사람 좋은 사장님이 하는 떡집도 있다. 높게 크게 지어지는 새 아파트와 함께 이곳들도 바뀔까 안타까웠는데, 나 같은 사람에겐 어떤 이유로든 남아있게 된 오래된 상가가 반갑다. 낡고 오래된 것들이, 낡고 오래되었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한 도시에서 축적된 기억과 시간이 늘어날수록 상실의 무게 또한 늘어난다.
자주 다니던 산책길에 꽤 훌륭한 커피집이 있었다. 어느 날 불이 꺼져있었고 얼마 후 주인이 바뀌었다고 했다. 내부의 모습은 그대로 인 것 같아도 맛은 정말 많이 변했다. 친한 친구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그렇게 아끼던 상점들이 사라지는 것보다 더한 상실은 풍경의 변화다. 바뀌는 스카이 라인, 산을 가리는 높은 건물도 답답하지만 아파트 단지 안에 지천으로 피었던 제비꽃, 민들레, 봄 까치 꽃밭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 저층의 아파트 지붕보다 더 높게 솟은 메타세쿼이어 나무가 잘려나가는 것, 봄이면 여느 공원이 부럽지 않은 벚꽃 나무 길과 코는 좀 힘들지만 눈은 황홀한 가을의 은행나무 길이 이제 기억으로만 남는다는 것. 시장 경제의 원리라고 하겠지만, 치솟은 집값을 감당하지 못해 떠나야 하는 사람들 또한. 지나다니며 눈인사를 하던 사람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마음 한 쪽을 베인다. 물이 눈가까지 차오른다.
아직은 상실과 슬픔보다 여전한 일상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올해도 어김없이 아름다울 단풍을 보고 싶다.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