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불의 시간

시간의 위로

by 산책

자동차의 시동을 걸고 창문을 열었다. 찰칵. 안전벨트를 채우고 리턴, 드라이브 순서로 기어를 바꿨다. 엔진이 예열되는 소리를 들으며 계기판 숫자 눈금이 올라가는 걸 지켜봤다. 가속 페달과 정지 페달을 번갈아 가며 오른발을 올리고 살짝 밟았다 떼었다. 왼쪽은 정지, 오른쪽은 가속이라 중얼거리며. 운전이 미숙하던 때에 정지 페달을 밟는다는 게 가속 페달을 밟아 인도 위로 덜컥 앞바퀴를 넘겨버린 이후 생긴 버릇이다. 그때부터 세월이 꽤 흘러 운전 경력도 늘었지만 가끔 운전을 시작하기 전에 상기시킨다. 왼쪽은 정지, 오른쪽은 가속.

오늘의 목적지는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지 않아도 되는 익숙한 도로여서 머릿속으로 갈 길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세어 본 적은 없지만 족히 수십 개는 될 신호등을 차례로 지나고 나면 긴 고개 하나를 다 넘을 때까지 어떤 정지 신호도 없는 길을 만난다. 시 경계를 넘는 구간에 들어서면 서서히 가속 페달을 밟는다. 오래되고 낡은 차에게는 버거운 언덕길이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차들의 뒤꽁무니를 보고 있자면 나도 몰랐던 내 안의 레이서 본능이 꿈틀 하기도 하지만, 나의 올드 카는 그 나름대로 본분에 충실하는 중이니 조급한 마음은 잠시 접어 둔다. 조금만 더 힘을 내. 나도 모르게 내 몸을 싣고 있는 무생물의 기계에게 영혼을 부여하고 말을 건다. 이제 다 왔어. 이제 언덕 끝이야.

반짝이는 뒤태를 뽐내며 가는 (적어도 내 차보다는 새 것일) 다른 차들을 부러워하면서도, 긴 시간을 함께 한 녀석에게 동지애를 느끼며 조금 더 수월하게 언덕을 오를 수 있도록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반쯤 내린다. 언덕의 정점을 찍고 내려가는 길, 달리는 엔진의 시끄러운 소리에 음악 소리는 이미 묻힌 지 오래지만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아래의 풍경과 창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계기판의 눈금은 어느새 제한 속도를 넘어섰다. 그렇게 한껏 달린다는 기분에 빠져 있을 즈음 신호등을 만난다. 앞 차의 브레이크 등 빨간 불빛에 나도 따라 속도를 줄였다. 빨간 불, 정지.

막힘없이 달리다 만나는 빨간 신호가 반가웠다. 그간의 세월을 함께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차에게 감정을 느끼는 모양인지, 달리기를 하는 동안 핸들을 잡은 나 역시 숨이 차는 것 같았다. 한 박자 쉬어갈 시간이야. 이쯤에서 신호에 걸렸으면 좋겠어. 차의 마음 같은 말이 내 마음에 들렸다. 감속, 정지.

숨 가쁘게 흘러가는 하루는 아니어도, 발바닥에 땀이 나게 뛰어다니는 하루는 아니어도 마음은 종종 거리며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이미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상상을 시작으로 일층에 도착하기 전에 버스 도착 시간을 확인하고, 엉킨 사거리 교통 상황에 운전사와 한 마음이 되어 인상을 찌푸리고, 쉼 없이 계단을 접어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도 한 칸 또 한 칸,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점심 메뉴를 고르면서 저녁 약속을 생각했고, 밥을 먹으면서 끊임없이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상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가 할 말을 생각했다. 생각이 몸 보다 10분쯤 앞서 있는 하루에 노란불이 들어왔다. 그냥 지나칠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빨간 불이 켜진다. 감속.

'지금' 횡단보도 앞에서 '정지' 하시오.

하루의 일과와 무수히 쏟아진 생각과 말이 길을 건널 수 있게 정지.

정지선 앞에서 앞 유리 너머의 구름 모양을 올려다본다. 지는 석양과 구름의 색에 감탄한다. 은행나무의 초록이 옅은 노란빛으로 바뀐 것을 알아차린다. 나오는 노래의 제목을 확인한다. '북극성'이다. 오늘 밤하늘에서 '북극성'을 찾아볼까 마음먹는다. 잠시 후 신호가 바뀌고 다시 서서히 가속 페달을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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