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문(美文)은 아닐지라도

by 산책

"문장을 계속 고쳐도 나아지지 않는 것처럼, 사는 것도 그런 것 같아. 아무리 고쳐보려고 해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러다 어느 순간이 되면 완료 버튼을 누르는 거야. 방법을 모르겠으니 더 보기도 싫고. 그럭저럭 읽어 줄 만하지 않나 싶은 거지. 눈에 띄는 미문(美文)은 없지만 비문(非文)도 없는 것 같고. 대강 읽어 보면 나쁘진 않은 거지.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하자, 이만하면 되지 않나? 무의식의 체념과 포기가 만들어 낸 자기만족?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정말 쓰기는 했나? 써 보기는 한 건가?

사는 것도 그래. 정말 살아보기는 했나? 제대로 살아보기는 했나? 아침에 눈 떠서 씻고 옷 입고, 만원 버스에 시달려서 회사에 도착해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친구 만나서 술도 한 잔 하고, 주말엔 어디 갈까 맛 집도 찾고 궁리도 하고. 그렇게 살아는 있는데, 살고는 있느냐 말이야. 그런 의문이 드는 거야.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극적인 반전을 줄 만한 무엇.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 "


"사는 게 다 그렇지 않아? 네 말대로 '눈에 띄는 미문은 없지만, 비문도 없다'면 성공한 거 아닐까? 앞에서 하는 말이랑 뒤에서 하는 생각이 다르지 않다는 거잖아. 사는 게 마냥 아름다운 어린 날도 아니고. 미문은 있으면 좋지만 그래도 비문이 적다면 잘 살고 있는 거지. 내가 보기엔 세상이 다 비문 투성 인 걸.

그리고 뭔가를 얻기 위해 하는 일은 대체로 아무것도 얻기가 힘들지. 지난번 기념일에 넌 Y가 준 선물이 마음에 안 든다고 투덜거렸잖아. 이런 센스 없는 애를 계속 만나야 하냐고 까지 했지. 그건 네가 원하는 선물을 바로 네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Y에게 말해 봤어? '지갑이 낡고 오래돼서 바꾸고 싶어. 이번 생일엔 지갑을 선물 받았으면 좋겠어.'라고. 마찬가지야. 극적인 반전을 줄 무엇? 그 무엇이 뭔지 우리는 몰라. 변화가 필요하다는 건 아는데 그게 뭔지는 모르는 거지. 딱 집어서 '지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바꾸고 어떻게 고칠 수 있겠어. 얻겠다는 기대가 없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지. 대부분 삶의 순간들이, 우리가 반짝인다고 느낀 순간들이 그렇고."


조금 치사하고 때로 뒤통수가 뜨거워지고 어떤 날은 목젖까지 차오르는 화를 누르고 또 어느 때에는 지내 온 모든 시간이 다 쓸데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날에는 가회동 어느 모퉁이의 돌계단에 앉아 있는 상상을 한다. 오래된 돌과 오래된 나무가 있는 동네, 아주 아주 오래된 것들이 조금씩 남아서 나에게 다 별거 아니란 이야기를 해 주는 상상. 도서관의 낡은 서가도 좋다. 손때와 곰팡이 냄새, 세월의 흔적에 누렇게 바래 버린 오래된 책들 사이에 서서 천천히 숨을 쉰다. 책 등을 보며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상상을 한다.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는, 죽고 못 사는 사랑도 죽을 것 같은 이별도 진짜 죽고 싶었던 절망의 순간도 다 별거 아니라는 이야기.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끝내 찾기 어려운 것이 인생이지만, 또한 사는 건 그런 지난한 시간을 버티고 보내고 흘려보내면서 만들어진 조각들이 모여 군데군데 반짝이는 조각보라는 것을. 내가 새기고 있는 문장들이 베껴 쓰고 싶은 미문은 아닐지라도 되뇌기 어색한 비문이지 않다면 그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인생이라는 위안을 받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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