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헤맸다. 비밀번호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네 자리 숫자로 단순했던 비밀번호의 세계는 영문과 특수문자의 조합, 여덟 자리 이상 등등으로 점점 더 복잡해졌다. 가입한 서비스 역시 늘어나면서 이제 머리만 믿고 있을 수 없게 됐다. 자주 하는 조합으로 비밀번호를 만들어 두곤 하지만 어느 때는 (무슨 마음에서인지) 완전히 다른 식으로 만들었다. 그때 나는 자신했다. 이건 까먹지 않을 거야. 좀 특별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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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가입했는지도 모를 사이트에서 메일이 날아왔다. 해지하려고 해도 도무지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는다. 본인 인증을 위해 이런저런 사항을 적기도 귀찮아지면 이내 포기하고 만다. 어차피 안 들어가는 사이트, 어차피 (언젠가 어딘가에서) 다 유출된, 이제는 공공재가 되어버린 나의 주민번호 따위. 그런 마음이 들어 더 이상 뭔가 계속하기를 멈춘다. 까먹지 않을 거라 자신했던 시간이 무안하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 매번 하던 걸로 만들걸 그랬지.
어차피.
몇 년 전에 가까운 이가 '어차피'라는 말을 자주 쓰는 나의 언어 습관을 일깨워줬다.
'잘 한 번 생각해봐. 그 단어에 대해.'
어차피. 부사, 이렇게 되든지 저렇게 되든지. 혹은 이렇게 하든지 저렇게 하든지.
어차피 안 될 일, 어차피 하게 되어 있는 일, 어차피 그렇게 될 일, 어차피 잊어버릴 일, 어차피 일어날 일.
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목적지는 같다는 것,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결과는 같다는 것. 그 안에는 '체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미 포기해버리는 마음이 있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순응과 수용의 자세도 있지만 대체로 내가 '어차피'라는 부사를 넣어 말을 할 때의 마음은 앞쪽에 더 가까웠다.
어차피 이건 혼자 하는 일이잖아. 누가 기다린다고.
특별하고 들뜬 마음이 무심하게 변하는 걸 지켜보는 과정의 마지막에 내뱉은 '어차피'에는 부끄러움이 묻어 있었다.
어차피 돌아올 거잖아. 기다리는 것도 나였고, 마음에 걸어둔 것도 나였다.
그래서 찾아 돌아왔다. 어차피 다른 거 할 것도 없잖아. 이렇게 앉아 있는 지금이 가장 좋은 사람 또한 나라는 것, 어차피. 저항해 봐야 돌아오는 건 지쳐가는 영혼이다. 자신하기 전에 스스로를 의심해 본다.
받아들일 일은 받아들이고 남은 힘은 해야 할 일에 쓰도록 하는 단어, 어차피. 지쳐있을 친구에게 안부를 묻고 서랍장 위의 뽀얀 먼지를 닦고 철 지난 지난 계절 옷을 옷장에 넣어 두고 (돈 벌면 꼭 바꿔야지 다짐하는) 무거운 노트북을 들고 집을 나섰다. 돌아가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