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 커튼 뒤의 이야기
복도에 무대감독님의 *페이징이 울려 퍼진다.
배우들은 자신의 등장 위치로 이동하며 마주치는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파이팅"을 연신 외친다. 그 비장한 각오들과 함께 목을 푸는 배우들의 노래 첫마디들로 복도가 쩌렁쩌렁 울리며 귀가 저릿저릿하다.
나는 손목시계를 톡톡 두드리며 놓친 건 없는지 다시 한번 생각한다.
'가만있어 보자.. 내가 미리 준비해야 할 의상들은 하나, 둘.. 오케이. 첫 번째로 갈아입는 의상도 바구니에 담아서 미리 **상수 소대에 갖다 두었다. 빠진 건 없어. 준비는 완벽하다고!'
예쁜 체크코트와 워커, 멋들어진 베레모와 또각구두를 신고 지나가는 배우들의 매무새를 살핀다.
"(신발을 가리키며) 배우님 구두 신발끈 풀렸어요~"
"웁스-땡큐!"
남자앙상블은 민첩하게 무릎을 꿇어 신발끈을 고쳐 맨다.
"어..! 마이 레이디, 잠깐만..!"
지나가는 여자앙상블의 셔츠 카라가 살짝 삐뚤어진 것을 고쳐 잡아준다.
그녀는 "감사합니다~" 하며 한껏 고운 목소리로 인사하고 찡긋-윙크를 하고 지나간다. 나는 엄지를 치켜들며 그녀를 보내준다. 다시 한번 시간을 체크한다. 공연 2분 전.
내가 담당하는 배우가 긴장한 표정으로 대기실에서 나온다. 소대로 향하는 그의 뒤를 따라 어두운 소대로 향한다. 그는 등장 전, 물을 아주 짧게 여러 번 마신다.
"아 오늘 컨디션이... 정상은 아닌 것 같아..."
"오.. 그래요...? 아까 목 푸실 때는 괜찮다고 느꼈는데..?"
"하... 주여 도와주세요.."
"(미소 지으며) 아멘."
무대로 오르기 직전 생수를 건네받고 그가 조명 하나 없는 계단을 잘 올라갈 수 있게 라이트를 비춰주며 끝단까지 잘 올라간 것을 확인한 후에 반대 방향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빠른 걸음으로 건너간다.
커튼 너머에 웅성웅성 소리가 잦아든다. 오늘은 딜레이가 없는 정시 시작이다. 정시 시작은 은근히 기분이 좋다. (1-2분 딜레이가 생각보다 정말 길게 느껴진다. 그리고.. 퇴근이 늦어지잖아!)
잠시 후 바이올린을 시작으로 오케스트라의 튜닝하는 소리가, 이어 지휘자를 응원하는 관객들의 박수소리가, 마지막으로 짙은 침묵이 주위를 감싼다. 내가 침을 삼키는 소리도 옆사람이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야맹증이 심한 나는 캄캄한 무대 한가운데를 가만히 응시한다.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배우의 실루엣이 천천히 눈에 들어온다. 계단의 맨 윗 단에서 그는 조용히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한다.
힘을 빡 준 멋진 ***오버추어(overture)가 들리면, 나는 천천히 손목과 발목을 돌리며 나름의 준비운동을 한다. 앞치마가 조금 헐거운 것 같아 매듭을 풀었다가 다시 묶는다. 긴장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서서히 배우가 일어나 내가 기다리던 대사를 시작한다.
"우린 더 밝은 미래를 꿈꿨습니다...... 미래." (높은 음의 피아노 소리)
내가 움직일 때가 되었다는 큐(cue)다. 잠시 후면 배우가 대사를 마치고 퇴장할 것이다.
오케스트라 음악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나는 눈을 감고 기도한다. 지금이 바로 내 기도타임이다.
"오늘도 부디. 무사히. 공연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미 수많은 리허설을 거쳐 몇십 번의 공연을 해 왔지만, 이 순간만 되면 왜 이렇게 떨리는지 모를 일이다. 얌전하게 기도를 하고 손을 짤짤 털면서 눈을 떴지만,
"아오 긴장되네, XX!"
결국 참지 못한 긴장감을 입 밖으로 툭 뱉어버린다. 서서히 커지는 앙상블들의 합창소리에 발끝부터 머리꼭대기까지 소름이 돋는다. 내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분장쌤과 소품쌤에게 차례로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며 하이파이브를 한다.
"... 그 앳된 얼굴들을..."
대사가 끝나고 커튼이 닫히자마자 그는 내가 서있는 방향으로 스프린트 하는 육상선수처럼 달려온다. 내 앞에 서자마자 입고 있던 재킷과 조끼를 한꺼번에 벗긴다. 대부분의 의상은 '똑딱이'라고 불리는 스냅으로 되어 있어서, 헐크가 옷을 잡아 뜯듯이 우두둑 뜯어버리면서 어깨 뒤로 넘겨 잡아당긴다.
소품팀은 안경을 건네받고, 분장팀은 수염과 가발을 떼어내고. 배우는 보타이를 툭. 뜯어내서 저 앞으로 던진다. 그렇게 배우를 가운데 두고 빙글빙글 돌며 노인에서 소년으로 의상부터 헤어, 분장까지 모두 변신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2~3분 남짓. 더 빠른 경우에는 10초 안에도 해야 하는 '퀵 체인지 (quick change)'라고 부르는 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3시간 남짓한 공연 내내 무대 좌우를 뛰어다니면서 완벽하게 해내야 하는 나는, 10년 차 뮤지컬 의상팀이다.
*페이징 : 안내방송.
**상수 소대 : (관객의 기준으로) 오른쪽의 무대 옆 공간.
***오버추어(overture) : 오페라나 오라토리오 따위에서 개막 전에 연주하는 악곡. 서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