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덕분에 진짜 여행을 만났다

여행의 단상 # 01

by 레터B
나는 그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


어릴 땐 여행이 마냥 좋았다. 낯선 언어, 처음 먹어보는 음식, 지도를 들고 이리저리 헤매던 골목들. 그 모든 것이 생경했고, 그래서 설레었다. 혼자 떠나도 괜찮았다. 오히려 혼자라는 사실이 나를 더 여행자답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여행은 점점 특별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어릴 적 새롭던 풍경은 어디나 비슷하게만 보였고, 음식은 어디선가 한 번쯤은 맛본 것 같았다. 목적지도 없이 헤매던 길은 이제 ‘의미 있는 곳’만을 향해야 할 것 같았고, 그렇게 구글 지도로 미리 짜놓은 동선을 따라 움직이다 보면, 하루 끝엔 그저 피곤함만이 남았다.


이번 여행도 비슷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여행 첫날, 미리 정해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남들이 다 가는 유명한 관광지를 들렀다. 그러나 둘째 날 아침부터 시작된 비가 모든 걸 바꿔놓았다. 갑작스레 내린 비로 예정된 일정을 모두 취소해야 했고,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한 마음에 무작정 기차를 타고 먼 곳으로 떠났다. 그저 창밖을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한참을 달렸다. 도착한 곳은 이름조차 낯선 작은 마을이었고, 그곳에서 마주한 풍경은 유명하지 않았지만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놓였다.


다음 날,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았지만 나는 남은 일정을 모두 접기로 했다. 아침에는 출근 생각 없이 느긋하게 일어났고, 아무에게도 쫓기지 않은 채 조용히 운동화를 신고 낯선 도시를 달렸다. 평소 같으면 건너뛰었을 아침 식사도 정성스레 골라 하루 세끼를 꼬박 챙겨 먹었다. 계획도, 욕심도 내려놓고 시간을 흘려보내자, 그 속에서 이상하게도 내가 보였다. 새로운 경험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고, 감탄할 무언가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는 그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 그것은 오래도록 하지 못한 일이었다. 결국 여행이란 멀리 떠나는 일이 아니라, 자신에게 돌아오는 일이 아닐까. 이번 여행은 조용히 나에게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풍경은 지나갔고, 기억은 시간이 지나 흐려질지도 모르지만, 여행지에서 보낸 그 시간만은 분명히 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