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와 롤라이 35

여행의 단상 # 03

by 레터B
어쩌면 내가 그 카메라를 놓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양보한 건 아닐까?


몇 해 전, 호주 멜버른은 여행하던 중의 일이다.


일요일 아침, 나는 멜버른 외곽에 자리한 Camberwell Sunday Market이라는 벼룩시장에 가기 위해 트램에 올랐다. 나는 원래 벼룩시장을 좋아한다. 뭐랄까,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괜찮은 물건’을 싸게 건지는 상상을 하는 게 즐겁다. 이를테면, 마음에 들어 우연히 산 그림 한 점이 알고 보니 유명 작가의 미공개 작품이었다든가 하는 식이다. 어쩌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멋지겠지만, (아니, 자칫하면 공항에서 미술품 유출 혐의로 붙잡히는 건 아닐까?) 그런 행운은 아직까지 내 차례가 아니었다.


시장은 생각보다 컸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늦가을 아침 공기 사이로 흘러나왔고, 나는 그 소리에 이끌려 이쪽저쪽으로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다 한 할머니가 파는 크리스털 촛대 세트를 발견했다. 빌레로이 앤 보흐. 상표 스티커도 떼지 않은 새것이었고, 가격은 고작 12달러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촛대를 샀다. 이런 건 망설이다간 누군가 먼저 낚아채기 마련이다.


그리고 촛대를 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근처 카메라 더미 속에서 조용히 숨어 있는 롤라이 35를 발견했다. 카메라 셔터가 눌리듯, 심장이 ‘툭’ 하고 반응했다. 가격은 겨우 20달러.


나는 카메라를 좋아한다. 특히 오래된 아날로그 필름카메라를 좋아하는데, 전자식 카메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촉감과 셔터 소리는 웬만한 음악보다 더 마음을 설레게 한다. 카메라를 이리저리 만져보니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사지 못했다. 어딘가 더 나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아니 착각 때문이었다. 그게 늘 문제다. 확신은 없지만, 더 좋은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확실한 선택을 미루게 만든다.


시장을 한 바퀴 더 돌아보았지만, 처음 본 롤라이 35보다 상태가 좋은 카메라는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서둘러 처음 그 카메라를 본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나의’ 롤라이 35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누군가 나보다 한 발 앞서 그것을 가져가 버린 것이다.


‘처음 봤을 때 샀어야 했는데.’


익숙한 후회가 마음속에 스르륵 흘러들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가격에 그 정도 상태의 카메라를 구하는 건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단히 희귀하거나 비싼 물건도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젠가는 다시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라는 건 가격표와 비례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그날 나는 꽤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그리고 여우의 신포도 같은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트램을 타고 시내로 돌아오던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모월 모일, 지난날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LIFE 잡지 속 사진들은 데이비드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당장이라도 그런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데이비드에겐 카메라가 없었다. 주머니를 뒤져봐도 그가 가진 건 할머니께서 주신 10달러짜리 지폐 두 장이 전부였다. 새 카메라를 사기엔 한참 모자라는 돈이었다. 혹시 쓸 만한 중고 카메라가 있을까 싶어, 데이비드는 트램을 타고 근처 벼룩시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명처럼 롤라이 35를 발견했고, 그날부터 그는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진들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런 상상을 하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그 카메라를 놓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양보한 건 아닐까?


흔히 인생에는 ‘타이밍’이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타이밍을 놓쳤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놓친 하찮은 그 순간이 누군가에겐 인생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그날의 롤라이 35는 언젠가 유명한 사진작가가 될 데이비드에게 양보한 걸로 하자. 게다가 내게는 아직 크리스털 촛대가 있으니까. 그것도 나름 꽤 괜찮은 거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