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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지원 Mar 07. 2024

'천천히'라는 조건이 '깊게'의 발동 요건인지도

순간을 내어 의식하기

나의 소중한 존재에게

이번주는 어땠니? 잠은 잘 잤는지, 밥은 거르지 않고 잘 챙겨 먹었는지, 언제 웃었는지, 혹 지치거나 울지는 않았는지 궁금해. 나의 이번주는 무언갈 느끼기엔 조금 많이 바쁜 편이었어.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버리곤, 하루 끝에 오늘은 뭐였던가 싶었던 날들이었지. 그래서 나의 감각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어.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신의 무감함을 인식하고는 영감이 떠오르질 않는다며 창작에의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 같아. 스치기만 해도 미친 듯이 생각이 터져 나오던 때를 떠올리며, 영감이나 느낌을 한때의 호시절 속 추억 혹은 자신의 통제 밖을 벗어난, 운명적이고도 마법 같은 것으로 우상화해 버리는 거야. 그러곤 영감과 느낌이라는 것이 다시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한때는 자신의 것이었던 그것들을 운에 맡겨버리는 것 같아.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실은 내가 스스로 생각을 멈추었기 때문인 것 같아.​

내가 가장 무감할 때, 그러니까 물에 탄 듯한 느낌일 때는 바로 먹고살기 위해 사무실에서 일할 때가 아닐까 해. 나의 꿈과 열정과 환희가 잠시 잠드는 곳. 하지만 어떻게 잉크가 선명한 순간만 있을 수 있을까? 볼펜의 잉크를 갈아 끼우는 것 같은 순간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잖아. 어쩌면 매 순간 의식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환상이 아닐까? 사무실에서의 시간마저 온전히 경험하고 몰입해 보려고 하지만, 그것이 성공한 적도 있지만, 반대로 사무실을 금방이라도 뛰쳐나가고 싶기도 했어.

사무실에서의 시간은 미지근하고 흐릿하지만, 그렇기에 나를 안정시켜주기까지 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 나의 개인적인 삶이 롤러코스터를 탈 때는 말이지. 이런 때마저 나를 쏟아붓고 나를 태워버릴 정도로 시간을 보낸다면, 이 시간 뒤에는 재만 남게 되는 건 아닐까. 태워버릴 것이라면, 갈 길을 모르고 삽시간에 번져가는 산불이 아니라, 오랫동안 스스로를 태우며 밝게 세상을 비추는 별 같은 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분명히 이 수채화의 시간은 나를 기다릴 수 있는 사람으로, 그럴 힘과 체력을 갖춘 사람으로 키워주고 있다고 생각해.

수채화는 수채화대로, 유화는 유화대로. 물 탄 느낌도 그런대로, 희미함은 희미한 대로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어떤 희미함은 몽환적이라고 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설사 내 희미함이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갖추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기다림 끝의 만남이 오색찬란한 것처럼, 이 수채화가 있기에 저 유화가 두텁고, 나의 꿈이 품은 향기가 짙을 수 있는 건 아닐까.

 

무감하다고 했지만, 지금의 내 상태를 무기력으로 퉁쳐버릴 건 아닌 것 같아. 여기서 조금 더 발견해야 할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 나는 정말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마치 볼을 꼬집어보아 꿈이 아닌지 확인해 보는 것처럼, 내 감정을 살펴보게 되는 거야. 무감정은 아닌듯했어. 주방 후드 배기구에서 나는, 다른 집에서 올라온 누런 삼겹살 냄새에, 천장의 발망치질에 짜증이 나는 것을 보면.

다만 다소 피곤한 듯해. 충분히 느끼고, 떠올리고, 생각을 이어가기에는.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일정 속에서 스스로와의 시간을 충분히 보내지 못했던 듯해. 그런 시간이 짤막하게 주어졌더라도, 일정 속 관계와 대화 속 감정으로 인해 혼자만의 시간마저 피곤한 상태로 보내버리는 거야.  ​

피곤해지면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았더라면 스치는 것만으로 벅차올랐을 소재들이 뇌의 표피에 부딪혀 튕겨 나가 버리고는, 나에게 들어오질 못하는 거야. 나를 바쁘지 않게 만들어주면 나아질 것 같아. 무엇을 하지 않을지를 먼저 결정해보려 해. 일단 구미가 확실히 당기지 않는 건 배제하려고. 내게 너무 어려워서, 또는 무거워서 이걸 할 생각을 하니 아침에 일어나고 싶지 않아졌던 일들을 덜어내 보려고 해. 가볍게. 비어있는 공간은 중요한 것 같아. 시간적으로든, 마음의 여유든, 관계든. 내가 비워낸 공간은 자연스럽게 명징한 의식과 생생한 감각으로 다시 채워질 거야.

'appreciate'라는 단어는 감사하다, 감상하다, 인정하다 등 다양한 뜻을 담고 있더라고. 가치를 아는 과정이 감상이고, 가치를 알게 되면 인식(사랑)과 감사를 하게 되잖아. 무감하다면, 내가 소망하는 가치를 잠시 잊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무감함이란 것은 사랑과 감사를 잃은 상태인 것 아닐까. 다시금 그 가치를 나의 삶에 부여해 보는 것이 어떨까. 내가 세상을 바라볼 멋진 색안경 하나 장만하는 거야. 그것이 삶에 대한 뜨거운 애정 표현을, 타는 듯 붉은 키스를 건네는 것 아닐까. 드디어 나는 무감함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찾은 건 아닐까.

모든 게 의미가 있기란 어려운 것 같아. 그 의미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 정의 내린 의미는 아닐까. 많은 의미를 갖는 것보다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가 더 중요한 것 아닐까.

그래서 나에게 어떤 의미가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무엇을 보건 듣건 맡건 맛보건 만지건, 나는 사랑을 인식하고 싶어. 그것이 내가 세상을 이해하고 경험하고 해석하는 방식이었으면 좋겠어. 고흐는 복권을 사는 사람들을 유치하다거나 불확실한 것에 돈을 쓴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들의 기대에 찬 표정에서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대. 음식을 사는 데 썼어야 할 돈, 마지막 남은 얼마 안 되는 푼 돈으로 샀을지도 모르는 복권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쓸쓸한 노력을 생각해 보았대.​

사람들에겐 저마다 사연이 있는 것이고, 저마다 마음이 있는 거잖아. 필기구의 손이 닿는 부분에 부드러운 소재를 감아 놓은 제조업자의 '제품과 고객에 대한 사랑의 마음', 연주에 아름다움을 담으려 노력한 피아노 연주자의 '음악과 청자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 상대의 마음이 다치진 않을까 살펴 말할 때 느껴지는 '듣는 사람에 대한 사랑의 마음' 하나하나를 느끼다 보면 가슴이 다소 벅차올라. 일상 속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나만의 잣대로 함부로 판단하면서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 세상에 아주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재차 깨닫게 돼.


어느 날은 어제의 무감함을 극복해 보고자 오늘을 감각하며 살기로 다짐해봤어. 너무 빠른 속도로 살아가다 보면 나의 감각을 지나쳐버리고 말아. '지금 빨리 이 일을 쳐내야 해', '지금 빨리 공부를 끝내야 해', '지금 빨리 이 책을 읽어야 해'라는 생각이 나를 뒤흔들어. 그렇게 뒤돌아보면 일도, 공부도, 책도 시간과 함께 그저 사라진 것뿐인 느낌이야.

시간을 내어 의식하는 순간이 필요해. 얕은 여울목의 물살처럼 세차게 흘러가려는 시간을 잠시 가두고 바라봐. 점차 잔잔하고 깊은 호수가 되어가. 천천히 흐르지만 깊어. 깊기에 천천히 흐를 수 있는 것인지도. '천천히'라는 조건이 '깊게'의 발동 요건인지도. 수많은 감각이 느껴졌고, 일순간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어. 늘 똑같은 풍경 속에서 새로운 것을 보았고, 그 풍경을 보고 있는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느꼈어. 느껴지는 감각을 스케치하듯 적어보는 거야.

으슬으슬하니 추워 따뜻한 물을 나에게 대접하고, 집을 나가기 전 머플러를 챙겼어. 커다란 화물차에 달린 바퀴가 무려 20개나 되는 것을 몇십 년 만에 비로소 보게 되었어. 키우고 있는 율마의 뒷모습이 거뭇거뭇하니 건강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지. 스쳐 지나가던 것들이 화학 작용을 일으켰고, 그날의 나는 많은 실험 결과를 기록하는 과학자가 되었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가 어제보다는 더 잘 감각되었어. ​

그리곤 깨닫게 되는 거야. 아, 매 순간 의식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구나. 순간을 내어 의식하는 게 맞는 말이로구나. 그렇게 감각을 느끼게 되고, 창의적이라고 생각하는 비유가 탄생하는구나. 그러다 보면 매 순간 의식적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많은 사유와 통찰을 할 수가 있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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