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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선화 May 03. 2017

3. 죽음과 삶의 관계성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죽음은 파라다이스가 아닐까?

대부분의 인간은 죽음을 싫어한다. 하긴 죽음을 열렬히 좋아하는 인간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죽는다는 것은 곧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가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내가 느끼고 있는 사소한 감각들,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발걸음 하는 장소들은 이제 나와는 무관한 것이 되는 것이다. 영혼의 행방은 아무도 모르지만 육체는 확실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내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새삼 무서운 일이다. 그럼에도 죽음은 우리에게 꽤나 가깝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인지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는 버릇처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말을 꺼낸다. 이때의 죽음은 나에게 고통을 주는 걱정거리들, 혹은 삶 그 자체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임시 대피소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데 도피에 대한 갈망이 심해진다면, 더는 삶의 가치를 못 느끼고 무기력해진다면, 죽음은 임시 대피소가 아닌 일종의 파라다이스가 된다. 죽음을 선망하는 이들 또한 죽음을 딱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바랄 뿐이다. 으레 사람들이 꿈을 갖는 것처럼 죽음 또한 하나의 지향점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에 내가 속했었다. 올해 들어 나는 삶에 대한 심각한 권태에 빠졌고 마침내 죽음을 선망하게 되었다. 지금의 삶,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 믿음과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빛나는 것들, 아름다운 것들 위에 절망의 그림자와 무기력의 그림자가 손을 포개어 그 색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이 세상은 잿빛에 불과했다. 내 눈에 비치는 세상이 곧 나의 삶인데, 세상이 이렇다면 내가 더 이상 살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내 빈자리를 허망하게 바라보기만 할 이들의 입장마저도 고려하고 싶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에피쿠로스가 인간이 죽을 때 존재하지 않게 되므로 죽음이란 무의미하다고 한 것처럼, 어차피 난 죽으면 끝인 것이었다. 후회의 감정도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는 절대적인 세계가 바로 죽음의 세계라고 난 믿었다. 그렇게 생기를 잃고, 잠들 때마다 죽기를 기도하면서 남은 미련을 차차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미련의 일부가 결국 나를 붙잡고 말았다. 친구의 제안으로 이번 겨울방학에 목요일마다 독서 모임을 갖게 되었다. 상태도 상태였지만, 사실 독서를 자주 하는 편은 아니라 책이 괜히 낯설어 매주 다른 두 친구들에 비해 불성실하게 참여했다. 그러다 나는 파울로 코엘로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 그 인연에는 내 불성실함이 다리가 된 셈이었다. 점점 읽고 싶어 지는 책이 없어서, 좋아하는 가수가 읽었다는 책 목록을 검토하며 그중에서 고르기로 결심했다. 꽤 불성실하고 수동적인 태도였다. 그러다 좋아하는 곡인 'Vitriol'을 쓴 계기가 되었다는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이 베로니카라는 사람은 왜 죽기로 결심했을지가 가장 궁금했다. 나 또한 죽고 싶은 사람이라 누구보다도 이 베로니카의 심정과 맞이하게 된 책 속 결말이 궁금했던 것이다. 결국 이 책을 손에 쥐고 숨 가쁘게 읽었다. 책을 읽을 때도 불성실해서 며칠, 심하면 몇 주에 걸쳐서 겨우겨우 읽었던 내가, 이틀 만에 이 책을 읽었다는 것은 이 책의 흡입력이 대단했다는 증거였다.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곧 베로니카, 그녀였다.


베로니카는 나 대신 삶을 직접적으로 포기하길 시도한 사람이었다. 그 과정과 결과를 미리 느껴볼 수 있음에 감사하며 그녀가 느꼈던 감정 하나하나를 가슴에 새겼다.


베로니카는 수면제 네 통을 일주일 동안 침대 탁자 위에 놓아둔 채, 다가오는 죽음을 끌어안고 사람들이 삶이라 부르는 것에 초연히 작별을 고했다. (중략) 그녀는 자신의 눈이 보고 있는 것, 자신의 귀가 듣고 있는 것에 행복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똑같은 광경을 삼사십 년이나 오십 년 동안 보고 듣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더욱더 행복했다. 몇십 년을 두고 봐야 한다면, 이  아름다운 광경도 머잖아 독창성을 모조리 상실하고 모든 것이 반복되는, 전날이나 다음날이나 다를 게 없는 존재의 비극이 되어버릴 테니까.


그녀는 결국 자살 시도를 한다. 삶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그녀는 그러나 결국 다시 삶으로 돌아오고 만다. 정신병원에서 생활하게 된 베로니카는 여전히 비뚤어진 상태였다. 죽지 않았다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된다. 아직까지 그녀에게 이는 다행인 소식에 가까웠다.


마치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를 돕고 싶다는 듯 아주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그들 자신은 그나마 행복하다고, 삶이 그래도 그들에게는 관대했다고 믿으며 즐거워한다. 그녀는 일찍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혐오했다. 베로니카는 청년에게 그녀의 상태를 그 자신의 욕구불만 해소 거리로 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녀는 청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웃었다.

"그럼 내가 실패한 게 아니네요."



이랬던 그녀는 정신병원에서 제드카, 마리아, 에뒤아르 등의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과의 대화가 어우러진 정신병원 안에서의 생활 속에서 그녀는 자신 속에 숨어 있던 미련을 마주하게 된다. 미련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강력한 감정 중 하나였다.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내 하루하루가 지겹도록 똑같았던 건 바로 내가 원했기 때문이라는 걸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아마도......."

하지만 결론은 매번 똑같았다.

"아마도는 없어.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는걸."

모든 게 결정되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중략)

"왜 어떤 사람들은 이 자연의 질서에 역행하려는 걸까?"

"내가 운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에요. 난 내가 혐오하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어요. 그래서 난 내가 혐오하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어요. 그래서 수면제를 먹었죠. 하지만 내 안에 내가 사랑할 수도 있는 다른 베로니카가 존재한다는 걸 모르고 있었어요."

(중략)

"몇 분 전만 해도 난 행복했어요. 죽음을 선고받았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있었죠. 그런데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다시 깨닫게 되자, 더럭 겁이 났어요."

(중략)

'그녀는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뭘 알고 싶었던 거지? 내가 운 이유? 내가 여느 사람들과 똑같은 욕망과 두려움을 지닌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걸, 너무 늦어버린 지금에 와서 그런 질문을 하면 내가 공포에 휩싸이리라는 걸 몰랐단 말이야?'



막상 죽음이 그녀에게로 가까워졌다는 것이 실감 나자, 그녀는 자신을 처절하게 돌아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삶에는 수많은 불만과 억압이 있었고 그에 대한 미련이 후회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그녀는 증오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증오했다. 그녀 자신, 그녀 앞에 놓인 의자, 복도의 망가진 라디에이터, 흠잡을 데 없는 사람들, 범죄자들. 그녀는 지금 정신병원에 갇혀 있었다. 그곳에서는 인간 존재들이 자기 자신에게 감추는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교육은 우리에게 오로지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갈등을 피하라고 가르친다. 베로니카는 모든 것을, 특히 자기 속의 수없이 많은 베로니카들, 매력적이고, 끼로 넘치고 호기심 많고, 용기 있고, 언제든 위험을 무릅쓸 준비가 되어 있는 그 베로니카들을 발견하지 못한 채 살아온 삶의 방식을 증오했다.


죽음의 그림자는 서서히 그녀에게 예고를 보냈다. 그 고통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공포스러웠다.


베로니카는 갑자기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팔이 뻣뻣하게 굳어왔다, 천장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심장 발작이었다! 그녀는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마치 죽음이 그녀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켜주기라도 하는 양, 이제 잠시 후면 모든 게 끝이야! 아마 고통스럽기는 하겠지. 하지만 이제 얻게 될 영원한 침묵에 비하면 오 분간의 고통쯤이야!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녀가 보인 반응은 그것뿐이었다. 영화에서 본, 눈을 크게 뜨고 죽은 시체가 그녀에겐 너무나 끔찍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심장 발작은 베로니카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점점 숨이 가빠왔다. 겁에 질린 그녀는 이제 곧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경험, 즉 질식에 이르게 되리란 걸 깨달았다. 그녀는 산 채로 매장당하듯, 바다 깊은 곳으로 갑작스레 끌려들어 가듯 죽어갈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조현병(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에뒤아르라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더욱 복잡한 감정이 그녀 마음속에서 휘몰아친다.


"아무도 무엇에 건 습관을 들여서는 안 돼. 에뒤아르 봐. 난 또다시 태양, 산들, 그리고 삶의 골치 아픈 문제들까지 사랑하기 시작했어. 내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그건 나 자신 이외의 그 어느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했지. 난 아직도 류블랴나 광장을 보고 싶고, 증오와 사랑, 실망과 근심, 진부한 일상에 속하지만 삶에 독특한 맛을 부여하는 단순하고 덧없는 그 모든 것들을 느끼고 싶어. 만에 하나라도 언제낙 내가 이곳을 나갈 수 있다면, 난 감히 미친 여자가 될 거야. 모든 사람이 미쳤으니까. 가장 못한 것은 자신이 미쳤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야. 그들은 남들이 그들에게 명령하는 걸 마냥 반복하며 살아가니까.

하지만 내겐 이 모든 게 불가능해. 이해하겠어? 마찬가지로 너도 해가 지기를, 한 여자 환자가 피아노 앞에 앉기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선 안 돼. 이제 곧 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내 세계와 너의 세계는 이제 영원히 만나지 못할 거야."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게 된다. 사회로부터 억압받아온 금지된 모든 것들을 체험해보자고 주장하는 수피 선생을 알게 되고, 그녀는 진정한 자아에 대해 고찰하게 된다.


"여러분들도 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미친 사람이 되세요. 하지만 정상인들처럼 행동하세요. 남들과 다르다는 위험을 감수하세요. 하지만 주의를 끌지 않고 그렇게 하는 법을 배우세요. 이 꽃에 집중하세요. 그리고 여러분의 진정한 자아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가만히 놓아두십시오."

"진정한 자아라는 게 도대체 뭐죠?"

베로니카가 그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이제 던져버려야 했다. 남자는 느닷없는 질문에 놀란 것 같았지만 곧 대답했다.

"사람들이 당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죠."

(중략)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장미를 응시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이해했고 자신이 본 것을 사랑했다. 그녀는 너무 조급하게 행동한 것을 후회했다.


이후 베로니카가 어떤 결심을 하고, 베로니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쭉 전개되며 결말에 가까워진다.

죽음을 간절히 바랐고 비로소 죽음을 선택한 그녀가, 막상 죽음이 가까워지자 많은 생각에 빠지며 혼란스러워하고 끝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된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그녀는 정신병원에 있으면서 값진 경험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소설 속이고,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경험이란 쉽게 얻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책이 존재하는 것 같다. 간접적인 체험도 어쨌든 체험이고, 실제로 나는 이 책을 읽고 그래도 죽어야겠다는 생각보다도 진정한 나를 고민해보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삶을 이끌어가고 싶다고 느꼈다.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죽는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진정한 나란 무엇이며 어떻게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들의 답을 찾는 것에 대한 어려움은 그대로지만, 적어도 이 질문들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도록 도와주었던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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