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하고 돌아오자 두 딸들은 사탕을 사달라고 조른다. 시장을 볼 겸 동네 마트를 가서 식료품을 사고, 아이들이 원하는 사탕을 골랐다. 집에 오는 길에 저녁식사 후 사탕을 먹을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목욕을 하고, 저녁을 먹고, 각자 해야 할 과업들을 수행하다 보니 어느새 사탕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나는 문뜩 사탕이 생각났지만 모르는 척 넘겼다. 그렇게 다음 날이 됐고, 퇴근 후 일과를 보내다 첫째가 “아! 맞다! 어제 사온 사탕!” 유레카를 외쳤다. 첫째 율(8세. 여)은 아빠가 거짓말을 했다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소리쳤다. 그 말에 응수하며 기억해내지 못한 너희들 잘못이라 책임을 돌렸고, 목소리 큰 나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하루를 정리하며 잠들기 전 고백했다. 생각이 났지만 모르는 척한 것이라고, 은근슬쩍 넘기지 말았어야 했다며 나의 잘못을 사과했다. 차라리 밤이 늦었으니 내일 먹자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았다. 아이들 잘못이라는 프레임으로 몰아간 것은 더 큰 잘못이다. 아이들과의 작은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나의 책임을 너의 책임으로 둔갑시키는 태도 속에는 애매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른들의 죄악, 애매성(ambiguity)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의 애매성과 꼭 닮은 일들이 있었다. 분명 어른들과 약속을 했는데 은근슬쩍 없는 일이 돼버린 경험, 어른들이 결정한 일이지만 나의 책임이 되는 경우가 그런 것이다. 이런 어른들의 애매한 태도는 기만에 가까웠다. 명절날 어른들에게 받은 용돈은 늘 엄마의 수중에 들어갔고, 가지고 있다가 필요할 때 주겠다는 말과 함께 돈은 사라졌다. 머리가 굵어진 중학생 때는 나의 것이라며 어른들의 애매성과 싸워 한판승을 거둔 통쾌한 일이 기억에 남는다. 고등학교 진학 때는 공업고등학교에서 기술을 배우겠다고 말했지만 인문계에 가야 한다는 부모님의 결정을 따라야 했다. 세월을 한탄하며 문과생임을 후회하기도 했지만 내 삶의 모든 책임은 내가 짊어져야 하는 것이기에 지금 말해봤자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 후로 어른들의 애매성을 믿지 않았지만 어느덧 그런 모습을 한 어른이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어쩌면 애매성은 아마도 삶의 본질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올바른 육아를 위해 정진해보지만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함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할 때가 많다.
애매한 육아가 가져오는 비극
한 번은 우유부단한 성격의 부모를 상담한 적이 있다. 무언가 결단하지 못하는 애매한 육아의 패턴에는 책임지지 않으려는 태도가 나타난다. 초등학교 2학년이지만 밥을 먹여줘야 하고, 혼자서는 신발을 신을 수도 없는 의존적이고 의욕 없는 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 온 것이다. 그는 자신이 내린 결단에 대해 책망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방임적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결단을 내리라고 조언했다. 육아를 하다 보면 아이에게 책임으로 전가하는 경우가 많다. 사탕을 잊어버린 책임을 아이들에게 전가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를 위한다고 선택권과 자유를 아이에게 위임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우는 것이 진정으로 아이를 위하는 것인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애매함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애매성을 물리치는 힘
이번 여름 물놀이를 하고 싶다는 아이들의 약속을 우여곡절 끝에 지켰다. 앞으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약속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문작가
무엇보다 실천이 가장 중요하다. 약속을 했다면 끈질기게 나서서 지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함을 경계해야 한다. 죽도 밥도 아닌 것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명확해지도록 해야 한다. 아주 작은 약속도 좋다. 지금이라도 지킬 수 있는 간단한 약속을 정해서 실천해보자. 아이에게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물어보고, 내일 퇴근 후에 사 오겠다는 약속도 좋다. 매일 잠들기 전에 책 읽기를 하자고 약속을 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아이들과는 작은 약속이라도 신중하게 해야 한다. 아이들이 처음으로 만나는 어른인 부모가 작은 약속에도 책임지는 모습을 보고 자란다면 아이들은 삶의 본질인 애매성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갖고 실존하는 존재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집요하게 끈질기게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어른이 되어 가자.
칼럼니스트 문선종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유치원 교사와 결혼해 두 딸아이의 바보가 됐다. 아이들을 좋아해 대학생 시절 비영리 민간단체를 이끌었고, 구룡포 어촌마을에서 9년간 아이들이 행복한 공동체 마을 만들기 사업을 수행했다. 지금은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홍보실에서 어린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moons8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