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종 사회복지사의 실존육아] 코로나19 상황에 대처하는 부모의 품격
지난 광화문 집회 발 코로나19 확산세로 돌봄 공백이 이젠 ‘돌봄 감옥’이 됐다. 고심 끝에 아내와 아이들을 고향으로 내려보냈다. 첫째는 새로운 학교에 전학 처리를 했고, 둘째도 다닐 만한 어린이집을 찾아 등록했다.
서로 떨어져 있으니 이산가족이 된 기분이다. 해외 활동 중 국내로 돌아온 사람들, 직장을 잃어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 말 그대로 난민촌에서 코로나19로 더 열악한 국면을 맞은 사람들까지 우리 모두 각자 삶의 갈림길에 서 있다.
설명 없이 낯선 곳에 아이만 덜렁… 버림받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이 다시 돌아간 곳은 3년 전 지진을 겪었던 포항이다. 당시 진앙과 불과 1Km도 안 되는 곳이라 피해가 컸다. 그때 첫째의 어린이집이 완파되면서 갈 곳을 잃어버렸다. 지자체에서 임시 장소를 내주었지만 산 구석에 다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고, 이사를 결정하기로 했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처럼 첫째가 갈 수 있는 유치원을 부랴부랴 찾았다. 다행히 갈 수 있는 곳을 찾아서 가까운 곳의 저렴한 임대아파트를 월세로 계약해 이사했다. 이번 코로나19 상황은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아내에게 가혹했다. 돌봄을 도와줄 아무런 가족이 없는 타지에서 버티는 것은 그야말로 돌봄 지옥에 갇히는 것이었다. 큰 결정을 내리고 짐을 쌌다. 반쪽짜리 이사를 한 셈이다. 내려가자마자 우리를 반긴 것은 태풍 마이삭이었다. 창문이 떨어져 날아갈 정도의 강풍에 두려움도 느꼈다. 옆집의 오래된 담벼락이 무너졌다. 코로나를 피해 온 곳에서 또 다른 재해를 만났다. 기후위기와 난민이라는 말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김포로 올라왔다. 서로 떨어져 있지만, 각자의 역할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아이들과 오래 떨어져 있어서 그럴까? 언제부터인지 둘째 딸 네 살 지온이가 내 전화를 피하기 시작했다. 3주가 지나고 포항에 내려갔다. 많은 일이 있었다. 나의 부모님이 아이를 돌봐주겠다며 지온이를 데려가셨다. 그렇게 일주일을 지냈는데, 지온이는 엄마 아빠가 안 보고 싶고, 집에도 안 갈 거고, 심지어 어린이집조차 가지 않겠다고 ‘보이콧’을 선언한 것이다. 아내가 직접 가서 지온이를 달래 데리고 돌아왔다. 내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님 집에 갔을 때, 지온이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갔을 때, 지온이는 차에서 내리지 않겠다고 30분을 울었다. 자신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맡기고 부모가 가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거다. 돌이켜보니 지난번 헤어질 때 새벽 첫차를 타고 오느라 아이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 했다. 어제 같이 잠들었던 아빠가 없어진 것이다. 지온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아빠가 말도 없이 없어져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엄마도 맡겨만 놓고, 언제 오는지 설명해주지 않아 서운했을 것이다. 어린이집도 적응 기간 없이 낯선 곳에 던져만 놓았다. 우리의 머리로만 생각했기에 지온이가 이 상황을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간과한 것들이 많았다.
“네 밤 자면 다시 만나”… 아이에게도 ‘브리핑’이 필요하다
3주 만에 만나 알게 된 둘째의 변화. 그 과정에서 ‘부모의 품격’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에 반성했다. 3주 만에 지온이를 만났을 때, 지온이는 나를 반기기보다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숨었다. 아빠에 대한 반가운 마음과 섭섭한 마음이 양가감정으로 나타났다. 어린이집은 며칠 쉬기로 했다.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보내겠다고 이야기했다.
일요일 밤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데 “아빠, 어디가?”라고 묻는다. 또 내가 없어질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었다. 금방 오겠다고 했지만 못 미더웠는지 같이 따라나서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 길에 같이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려 지온이가 좋아하는 것들을 사줬다. 오는 길에 이렇게 이야기했다.
“지온아. 아빠는 오늘 지온이랑 같이 자고, 새벽에 기차를 타고 가. 지온이가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아빠가 없을 거니까 놀라지 마. 그리고 아빠는 네 밤 자면 또 올 거고. 지온이가 아빠를 보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영상 통화할 수 있으니까. 언니랑 엄마랑 잘 지내고 있어. 알겠지?”
네 살에게 충분한 설명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예측할 수 있도록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줬다. 사회복지사로서 늘 현장에서는 당사자들의 뒤를 따라가며 눈높이를 맞춰왔는데, 아이들에게는 소홀했다. 세상이 급변하다 보니 아이들을 앞서고 만 것이다. 어쩌면 너무 앞서다 손을 놓친 것도 모르고 달렸나 보다.
문득, IMF 때가 생각난다. 아버지가 직장을 잃었을 때 무거운 집 안의 공기를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때 성격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어른들도 답답했겠지만 무거운 침묵 속에서 불안감을 누군가 설명해주었다면 움츠러들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4월 어린이날을 앞두고 중앙 방역대책본부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브리핑을 했었다. 어른의 품격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이번 추석은 집에서 보낸다. 아이들을 위해 앞으로 코로나19 상황에서 우리 가족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브리핑을 준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