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아이들을 관찰하는 일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평소 두 딸아이를 즐겨 관찰하고, 기록한다. 아이들의 말과 행동의 기저에 깔린 무의식과 아이들의 타고난 기질, 경향성을 보고, 듣고, 기록한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절대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기록을 하다 보면 한 존재의 이름이 지워지면서 또 다른 존재가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팬데믹 시대에 어두운 그림자가 아이들의 실존을 가리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집에 머물러야 하는 주말이었다. 8살 첫째와 4살 둘째가 역할놀이를 한다. 첫째는 겨울왕국 엘사 드레스를 둘째는 시크릿 쥬쥬 샤샤 드레스를 입었다. 공주놀이를 하며 대화를 주고받는다. 요리를 만들기도 하고, 상황을 연출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언뜻 보기에 평화로운 광경이었지만 유심히 관찰할수록 첫째의 일방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언니가 이렇게 해라고 했잖아"
'언니가 이렇게 하면 '엘사 공주님 도와줘요'라고 말해야지"
"얼어라 얍! 하면 움직이면 안 돼. 얼어있어야 해. 알겠지?"
"움직이지 마라니까. 언니가 말했잖아"
첫째는 역할놀이의 대본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둘째에게 지시했다. 놀이에서 뿐만 아니라 집에서 생활하는 내내 둘째를 간섭했다. 아이들의 놀이라 참견하면 안 되지만 둘째가 언니의 리모컨이 된 것 같아 부득이 개입했다.
"서율아, 지온이도 자기의 역할을 맡았으니까. 말하고 싶고, 행동하고 싶은 대로 존중해줘야지 않을까? 그렇게 다 정해주면 언니랑 노는 게 재미없을 것 같아"라는 전했다.
하지만 이런 첫째의 행동은 계속됐다.
◇ 팬데믹의 불안을 통제하려는 인간
팬데믹의 불확실한 시대, 두려움과 좌절, 공허감이 매일 우리들의 마음의 문 턱을 넘나 든다. ⓒpexels
시험을 앞두고, 공부를 해야지 하고 책상에 앉았는데 갑자기 책상 정리를 시작으로 방청소를 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필자도 시험을 앞두고 시작한 책상 정리가 대청소에 가구 배치까지 이어져 집을 새롭게 단장한 기억이 있다. 이런 행동은 시험이라는 불안을 통제할 수 없어 책상이라도 통제해 부분적으로 불안감을 지우려 하는 것이다. 이런 경향성은 누구에게나 크고 작게 나타난다.
팬데믹 시대 거리두기가 지속되면서 집 안에서 답답한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평소 깔끔한 성격인 나는 최근 들어 집이 깨끗해야 한다는 강박이 더 심해졌다는 것을 느낀다. 불안한 팬데믹 시대에 집 안의 상황을 통제해야 마음이 그나마 나아지기 때문이다. 늘 어지럽히는 아이들을 뒤 따라다니며 집안 정리를 하다 보면 짜증이 밀려온다. 물리적인 시 간이나 사물을 통제하다 보면 궁극에는 사람에게까지 뻗어나간다. 배우자나 아이들을 통제하게 되면서 강압적이게 되고, 선을 넘게 되면 폭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첫째가 둘째에게 보이는 통제적 행동은 부모의 불안과 팬데믹이라는 불안의 감정이 전이된 것은 아닐까? 하는 가설을 세우게 한다.
◇ 절대 통제할 수도 통제될 수도 없는 존재
불안의 궁극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나약한 우리의 모습을 마주해야 한다. ⓒpexels
불확실성의 불안으로 주변의 상황을 통제하려는 것은 아마도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통제를 당할 경우 반발은 심해지고, 통제가 다시 통제를 낳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감염이 심각한 미국에서는 기업들이 코로나를 앞세워 직원의 위치를 파악하는 앱을 배포해 인권침해라는 질타를 받고 있다. 유발 하라리 교수도 한국을 코로나 19방역에 대한 우수성을 꼽으면서도 추적 앱 사용에 대해선 경계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팬데믹의 불완전한 시대에 가중된 불안이 사람에게 전해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상황을 통제하려 한다. 사람보다는 물리적인 환경을 통제해야 한다. 직장에서 무능한 직원은 자신의 무능함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능함을 들킬 수 있다는 불안감에 부하 직원을 통제한다.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는 가장은 자신의 무능을 숨기기 위해 더욱 권위를 앞세워 가족을 통제한다. 우리가 팬데믹을 통제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부모 되기
아이들의 눈에 부모는 큰 힘을 가진 존재로 비친다. 거기에 맞춰 나약하고 힘든 모습보다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그럼에도 팬데믹의 불확실한 상황에 마주쳐야 하는 두려움, 좌절에 속수무책이다. 나약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두려움을 피하기 시작하면 무언가를 통제하게 된다. 실존주의 심리 치료자 어빈 데이비드 얄롬(Irvin David Yalom)은 인간이 실존의 근원적 불안인 죽음과 소외, 무의미, 자유를 거부하면서 병리가 생긴다고 말했다. 인간이 인간을 통제하는 행위가 병리적인 이유이다.
유일하게 통제해야 할 것은 나 자신이다. 두려움을 외면하지 않도록 스스로 통제해야 한다. 불확실성 앞에 누구나 무기력하고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우리가 되어야 한다. 팬데믹 시대의 두려움과 무능력감, 좌절감, 공허함이 찾아올 때 피하지 말고, 수용하자. 불안은 인간을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정신역동의 근원이다.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자.
칼럼니스트 문선종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유치원 교사와 결혼해 두 딸아이의 바보가 됐다. 아이들을 좋아해 대학생 시절 비영리 민간단체를 이끌었고, 구룡포 어촌마을에서 9년간 아이들이 행복한 공동체 마을 만들기 사업을 수행했다. 지금은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홍보실에서 어린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moons8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