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종 사회복지사의 실존육아] 익명성이라는 '절대 반지'
지난 추석, 우리의 안방을 달군 나훈아의 노래 ‘테스 형!’ 가사처럼, N번방에 교사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에 “진짜, 세상이 왜 이래?”라며 탄식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 네 명이 박사방 유료회원으로 활동한 사실에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일을 놓고 단순히 교사라는 직업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사건의 본질에 집중해서 인간의 도덕성이 어떻게 무너지는지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 ‘익명’이라는 힘이 생긴다면, 우리 또한 악해질 수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핵심은 '익명성'이다. N번방 가입자 대부분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익명성이라는 가면을 쓴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마피아 게임과 같다. 선량한 시민이 안내자로부터 마피아라는 익명성을 부여받는다. 낮이 되면 시민이 되어 자신은 마피아가 아니라고 하지만 밤이 되면 선량한 시민들을 죽이는 악마로 돌변한다.
이런 게임의 법칙이 지금도 온라인상에서 자행되고 있다. 익명성이라는 모종의 힘이 우리에게 부여된다면 우리도 악해질 수 있다는 전제를 가져야 한다.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라는 생각은 오만함이며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철학자 플라톤의 저서 「국가」에서 플라톤의 작은 형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에게 인간은 무능하고 힘이 없어서, 도덕을 수단화한다고 주장하고, ‘기게스의 반지(Ring of Gyges)’ 우화를 예로 들며 정의에 대해 질문한다.
리디아에 사는 목동 기게스가 어느 날 우연히 금반지를 발견한다. 기게스는 그 반지를 끼고 돌리면 자신이 투명인간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게스는 이 반지의 능력을 활용해 리디아의 왕비를 겁탈하고 왕을 살해한 후 왕궁을 장악한다.
글라우콘은 도덕이란 인간이 무능하고, 힘이 없어서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도덕이 수단화되는 것은 옳지 않다며 개인적 차원이 아닌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간의 올바른 행동은 자기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은 「국가」를 통해서 국가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는 것이 아니라 선함의 실현을 위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유명한 영화 ‘반지의 제왕’은 바로 이 기게스의 반지 우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영화는 프로도가 반지를 낄 때마다 악한 본성이 조금씩 드러나도록 섬세하게 묘사했다. ‘마이 프레셔스(My precious)’를 외치는 스미골은 반지를 탐닉하다 두 개의 인격이 생기는 '자아분열'을 겪는다. 이처럼 우리가 익명성 뒤에 숨어 또 다른 자아로 살아갈 수 있는 가면(페르소나)을 부여받는다면 어떤 비극이 그려질지 모를 일이다. 익명성이 그만큼 무섭다는 말이다. N번방의 교사들만 놓고 본다면 테스 형보다 글라우콘의 말이 더 옳아 보인다.
◇ 해로운 익명의 존재 간파하는 ‘리터러시’ 가르쳐야 할 때
익명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일이 참 쉬운 세상이다. ‘부캐’가 대세인 요즘, SNS에서는 본계정이 아닌 부계정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 모르게 활동한다. SNS에서만 그런가. 요즘 나오는 차에는 선팅이 강하게 돼 있어서, 그 안에 누가 있는지 모른다. 이것은 운전자에게 익명성으로 작용해 난폭운전, 보복운전 음주운전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익명으로 로그인한 인터넷 세상의 또 다른 자아가 짧은 텍스트로 만든 ‘악플’이라는 흉기로 타인을 고통에 빠트린다. 본연의 자아로서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과감해지기 위해 필명을 써 자신을 숨기는 작가도 있다. 심리학자들도 수많은 실험을 통해 인간이 익명성을 얻었을 때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며 잔혹해짐을 증명하고 있다.
역시나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리터러시(literacy)’다. 익명의 존재가 나에게 접근할 경우 그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리터러시는 우리말로 문해력이다. 문해력의 '해'는 풀 ‘해(解)’로 칼 ‘도(刀)’와 소 ‘우(牛)’, 뿔 ‘각(角)’이 합쳐진 한자다. 칼로 소의 뿔을 뽑듯이, 실체를 숨긴 채 접근해오는 익명성을 간파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 코로나로 디지털이 ‘뉴 노멀(New normal)’이 된 오늘날 아이들의 눈을 가린다고 될 일이 아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남도록 수영법을 가르쳐야 한다.
2012년 헌법재판소는 인터넷 실명제를 위헌이라 결정했다. 하지만 최근 악성 댓글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례들이 늘면서 실명제에 대한 여론은 계속 고개를 들고 있다. 익명성은 양날의 검이다. 익명의 제보자나 남모르게 선행을 펼치는 것처럼 긍정적인 요소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국가를 구성하는 도덕적인 사람들도 많다. 성선설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성악설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있을 뿐 인간에 대한 본성이 무엇이라고 딱 잘라 가르칠 수 없는 실존 상실의 시대에 놓여있다. 익명성이라는 반지를 꼈을 때 우리의 실존적 자아가 온전한지 되돌아보며 경계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