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끄럽게 만든 우리 아파트 인권 클래스
최근 세종시의 한 아파트에 대한 언론보도를 접했다. 입주민 회장이 임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내기 싫다며 교육청의 학군 조정을 결사반대 하자고 벽보를 내건 것이다. 아파트 이미지가 부동산 가치에 영향을 미친다는 나름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부끄러움은 입주민들의 몫이었다. 주민 몇몇은 여기에 반발했고, 결국 벽보를 붙인 입주민 회장은 사퇴했다고 한다. 혹시나 해서 우리 아파트 사람들은 어떤지 온라인 카페를 뒤져봤다.
아니나 다를까 하나의 논란거리를 찾았다. 아이들이 출입구나 엘리베이터에서 버튼을 누를 때 키가 닿지 않아 설치하는 발판에 관한 부분이다. 아이들을 위한 발판을 설치하자는 안건이 주민자치회의에 나왔는데, 부결된 것이다.
첫 번째 이유부터 터무니없다. LH에서 설치했다는 것이 발판을 설치하지 말아야 할 사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LH에서 설치한 것을 우리도 설치하면 LH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일까? 내가 이런 동네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행히 주민들 중 몇몇이 부결된 이유가 공감이 되지 않는다며 재고를 권유했다. 그래도 마음씨가 착한 이웃들이 있다는 것에 위안을 얻었다.
다른 이유에서도 아이들에 대한 인권 감수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이들을 '벨튀'(벨을 누르고 튀기)하는 귀찮은 존재로 여기거나, 키가 작은 아이들도 혼자서 다닐 수 있다는 주체성을 무시한 것이다. 이런 생각 속에는 아파트 값보다 더 앞서 고려돼야 할 인간에 대한 존중이 결여돼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이들을 존중하는 이웃들이 계속해서 건의를 했기 때문인지 지금은 발판이 설치돼 있다. 이런 작은 것들도 그냥 이뤄지지 않는다는 생각에 경외심마저 들었다.
◇ 어린이용 발판의 높이는 바로 '존중'의 높이
아이들에 대한 존중은 어디로 간 것일까? 세상은 좋아지고 있고, 살고 있는 아파트도 최첨단이 돼가지만 인간에 대한 존중은 퇴보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명예를 중요하게 여긴다. 좋은 차와 좋은 주거지를 통해 자신의 명예를 확인하기도 한다.
사회학자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타인의 눈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혹은 자신의 존재를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야 명예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가정한다. 즉, 우리의 명예를 확인하기 위해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해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엘리베이터 발판을 설치하는 의견에 LH가 등장하는 이유가 그런 명예훼손에 해당한다. 아파트의 값에는 이런 명예를 위한 비용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존중의 결여는 사람을 공격적으로 만든다. 최근 입주민의 갑질로 극단적인 결심을 해야만 했던 경비원과 고급 레지던스에서 발열체크를 하려는 경비원에게 ‘책상발령’을 낸 이야기 속에서, 명예훼손을 넘어 목숨까지 위협하는 잔인한 폭력성으로 나타난다.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로 인간에 대한 존중은 풍전등화와 같다. 이런 현실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엘리베이터를 누르기 위해 올라선 발판은 아마도 존중의 높이일 것이다. 그 작은 높이가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만큼 클 수도, 종이 한 장의 두께만큼 작을 수도 있다. 그 높이를 비용이 아닌 사람에게 다가가는 가치로 봐야 할 것이다. 나도 아이들을 대변해 댓글을 단 이웃처럼 삶 속에서 결여된 존중을 찾아 목소리를 낼 것이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존중을 몸소 보여주고 싶다.
그동안 우리의 시선에서 벗어나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분들에게 무심했다. 앞으로 그런 고마운 분들을 만나면 존중을 담아 위신과 명예를 벗어버린 낮은 자세로 인사를 하려 한다. 아이들 앞에서 보여줄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가르침의 시작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