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아버지의 등목

또랑물 따라 흐르는 웃음

by 정온

집 아래엔 돌담으로 둘러싸인 논이 있었다.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아주 가느다란 또랑물은

집 뒤 새미(우물)를 지나 삼촌네 밭을 따라 흘렀다.

우리 집 조그만 빨래터에서 잠시 휘돌아 머문 뒤

담벼락 아래로 내려가 돌담에 숨어들었다.


그 물은 다시 논 옆을 따라 작은 또랑이 되어

길옆으로 난 실개천을 타고 흐르다가

끝내는 아랫마을 바닷가로 내달려,

이내 짠물을 만났다.


한여름에도 마르지 않는 또랑물은

졸졸졸 쉼 없이 흐르며, 맑게 빛났고

물 위로 소금쟁이들이 몰려와

종일 물결에 둥둥 떠다녔다.


무더운 여름날,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삼베 저고리를 벗어 빨랫줄에 툭 걸치곤

엄마를 부르셨다.

“어이— 자네, 등목 한 번 해주게.”


장독대에서 된장을 푸시던 엄마는

손에 묻은 장을 툭 털고 나를 부르셨다.

“니 아버지 등에 물 한 바가지 부어드려라.”


나는 얼른 또랑으로 달려가

시원한 물을 한 바가지 떠

엎드려 계신 아버지의 등에 부었다.


“한 바가지 더, 한 바가지 더.”

서너 바가지를 연달아 퍼부으면,

아버지는 “으ㅡ차차차!” 하시며

시원한 몸서리를 치고 껄껄 웃으셨다.


기억 속에 유독 선명한 건,

'허리선에서 등 쪽으로 물을 부어라'는 말이었다.

물바가지가 무거웠던 나는,

가끔 아버지 목덜미쯤에 물을 붓곤 했다.


그러면 물이 코며 입으로 들어가

아버지는 킁킁, 코를 풀고는

손으로 코와 입을 훔친 뒤

등에 손을 올려 웃으시곤

"여기다, 여기 부어!” 하고 가르쳐주셨다.


물을 들이마시고도,

고사리손이 부어드린 그 등목의 순간은

정말 시원하고, 참 마음 따뜻했을 것이다.


어릴 적엔 나도 웃통을 벗고,

엄마가 퍼주는 또랑물을 온몸으로 맞으며

춥다고 맨발로 마당을 뛰어다녔다.


뙤약볕에 바짝 마른 시멘트 마당 위엔,

물 도장을 찍은 맨발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물이 차갑다고 오도방정을 떨다가,

엄마한테 팔이 붙들려 질질 끌려와

다시 찬물 세례를 맞고는,

“아이고 찹다~ 아이고 추버라~” 하며

또 그 물로 장난질을 하던 그때.


등짝 한 대쯤 맞을 법도 했지만,

물장난은 그저, 하루의 일상이었다.


5월의 끝자락,

그리운 동심 시절 생각에

마음이 잠시 살랑거리고 설렜다.


지금 내 눈 속에는

작디작은 그 꼬마가 희미하게 웃고 있다.

그 웃음을 따라,

피아노 선율처럼

고요하고 시원한 물소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또르르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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