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한 사람과 부족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약자가 될 수 없었다

by 산호


그와 처음 먹은 음식은 설렁탕이었다. 그는 그게 썩 의아한 듯 보였다. 첫 데이트는 항상 파스타였다나. 고작 뭐 이런 걸 가지고, 생각하며 맛있게 먹었다. 그날은 겨울이었고, 추운 날엔 따뜻한 국물이 필요하니까. 그다음엔 술을 먹자고 했더니 또 의아해했다. 내가 술을 안 먹자고 할 줄 알았다나. 술 먹는다고 뭔 일이 생기니, 하며 데려갔다. 가로등 불빛 아래 내리는 눈이 예쁘다고 필름카메라로 하늘을 한참 찍다가 말이다. 한 달간 이어진 통화로 우리는 제법 친해져 있었다. 그 통화도 심히 엇박자였다.

“나 힘들다.”

“뭐가?”

“나 기다린다.”

“뭘?”

“우리 언제 만나?”

“너 나 만나고 싶어?”

“내가 전화를 왜 하겠어?”

“아, 난 널 힘들게 할 생각이 없어. 내가 지금 거기로 갈게.”

“지금? 아니야, 지금은 아니야.”

“도착해서 전화할게.”

진짜로 몰랐냐고? 진짜로 몰랐다. 나는 내 얘기에 푹 빠져서 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중을 따질 겨를은 없었다. 막상 만나보니 그는 내가 한 달 동안 했던 이야기를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얘가 나한테 관심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예컨대 술집에 들어가서 앉자마자 종이학과 별을 접어서 툭툭 주기 시작했다. 내가 전화로 좋아한다고 한 거였다. 원래 다 그렇게 유치하고 찬란한 거에 마음이 줏대 없이 넘어가지 않던가. 종이학과 별, 고작 그걸로 교환하기엔 그 후의 감정이 고통이었는데. 그는 부산 남자였고, 마지막 말은, “내 잊을 거가?”였다.

무의식에는 남아있고 의식에는 없어진 걸 잊었다고 해야 할까? 내가 그나마 아직도 모든 신경으로 기억하는 건 마지막 통화다. 먼저 그를 떠났던 나는, 그를 다시 잡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새벽 4시였나. 통화 버튼 위에서 엄지 손가락이 5시간 정도 멈춰있었다. 침대 창가에 기대 눈을 질끈 감고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을 때, 수신음이 끝나더니 그가 가만히 전화를 받았을 때, 바짝 마른 입술을 떼서 내가 첫마디를 간신히 건넸을 때가 생생하다. 그는 나를 거절했다. 선택은 내가 했다며. 그 선택을 후회하냐고? 아니, 그러기엔 우린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게 없었다.

그래도 좋아했다. 그 순간순간에는 평범하고 당연하게 펼쳐졌던 장면들이 나중에는 하나로 똘똘 뭉쳐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의미가 됐다. 돌아보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이 멀어진 의미를, 다시 떠올리는 이유는 다가올 두려움을 바라보기 위해서다. 사랑은 그랬다. 아무것도 아닌 게 갑자기 모든 것이 된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그렇다. 왼손과 오른손 중에 하나는 집에 두고 오라고 할 수가 없다. 사랑이 시작되면 얼마간은 좋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나 먼 훗날, 관계에 대한 책임감으로 버텨야 하는 구간이 온다. 모든 과거에서 나나 상대가 등을 돌렸는데 이번에는 다를 거라는 자신을 무슨 근거로 가져야 하는가? 상대가 달라서? 아니면, 내가 지난 연애로부터 배운 게 있어서?

한동안 이별 Playlist만을 반복해서 들었다. 지난 헤어짐에서 들었던 곡들을 하나하나 다시 들었다. 혼란스럽게 뒤엉킨 마음에 잔뜩 짓눌린 밤에는 힘을 내려고 편의점에 가서 핫바와 사이다를 우걱우걱 먹었다.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터지기도 했다. 사랑을 하고 싶지 않다고. 더 정확하게는 이별을 다시 하고 싶지 않다고. 나를 진정시켜 준 곡은 신지훈의 <추억은 한 편의 산문집 되어>. “사랑이 떠나간 자리에 홀로 남겨져 / 모든 걸 바쳤던 나를 미워했네 / 이제 그만 실어 보내리 / 그 맘은 전부 진심뿐이었으니”.

매번 두려움을 이겨내듯 이번에도 두려움을 이겨내게 만드는 사랑이 나타나겠지.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혀진다’는 진리가 서로의 그림자를 밝히는 등불이 되기를. 감정과 생각에 압도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주어진 장면들을 그 자체로 아껴주기를. 밤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함께 보았던 눈이 내리니, 우리의 청춘이 남긴 의미들이 소복소복 쌓이기를. 부족한 사람과 부족한 사람이 만나는 미래를 꿈꾸며 셀프 고문이었던 이별 Playlist를 지우고 <광인>의 구절을 읽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약자가 될 수 없었다. 약자가 되는 건 사랑할 줄 모르는, 그저 헤어짐을 두려워하는 사람일 뿐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삶에서 약자가 될 수밖에 없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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