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친구가 병에 걸렸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냐고 한 동생이 물었다. 얼마 안 가, 동생이 많이 아프다며 어떻게 해야 되냐고 한 언니도 물었다. 혹시 도움이 될까 봐 다 지났다고 생각했던 옛 기억을 떠올려 열심히 말하는데 조심스러운 언니가 잠시 나를 멈추게 했다. “더 묻어둬도 괜찮아. 아직 이르면 말하지 않아도 돼.” 이 와중에도 마음이 고와서 웃었다. 일상을 살 때는 아무렇지 않다. 그런데 말로 꺼내니 다르긴 했다. 집에 돌아와 밤새 잠을 설쳤고 심장이 과거로 곤두박질쳤다. 계속 혼잣말을 했다. ‘잘 지나왔어. 모두 고마웠어.’ 세 번의 연애 중 한 번은 상대가 아팠고 한 번은 내가 아팠다. 어떤 일들은 마음에 고드름처럼 맺혀있다가 따뜻함에 떨어진다.
드라마 <멜로가체질>의 은정은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해 환영을 본다. 은정의 슬픔을 들은 상수는 소주잔을 그녀의 눈에 건배하듯 맞대고 카사블랑카의 대사를 중얼거린다. “당신의 눈에 뭐가 보이든, 나는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드라마는 서른 즈음 여자 셋의 우정과 사랑을 다루는데 나는 은정의 서사에 가장 몰입됐다. 아픈 사람의 마른 입술과 흐릿한 동공을 알아서다. 내가 아닌 내 어깨너머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성한 두 팔로 안을 수 없는 커다란 공기가 있다. 말없이 가슴에 뜨거운 기운이 쌓였던 그 시절의 우리를 달래는 말,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병은 늦게 나았다. 사랑은 그전에 끝났다. 나는 캔맥주를 마신다. 어딘가에서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고 있을 무수한 이들에게 조용한 응원가를 부르며.
환영을 보는 은정을 같이 사는 친구 둘은 모른 척한다. 은정이 허공을 보고 말할 때도 그냥 넘어간다. 그러다 어느 날, 은정이 집에 들어와 “나 아파. 너희한테 하는 말이야.”라고 할 때, 친구 둘이 다가와 울면서 안아준다. 은정의 눈에 옆에 있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 거다. 아물기 위해. 위로할 때는 누가 누굴 위로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너무나도 위로답게. 내게 물어본 동생과 언니도 그랬다. 처음엔 내가 위로하려고 했는데 자세히 보니 이건 내가 위로를 받은 거다. 빛이 어둠에, 어둠이 빛에 기댄다. 잠을 잘 자고 밥을 잘 먹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