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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사 Aug 20. 2020

워 아이 니, <하나와 앨리스>

전지적 앨리스 시점에서 겪은 특별한 성장통

"인생 영화가 뭐예요?"


대답하기 정말 어려운 질문이 있다. 바로 '인생 영화'를 고르는 것이다. 나는 영화가 주는 메시지, 영상미 그리고 음악 이 세 박자가 완벽히 맞아떨어지면 마음속 인생 영화 책장에 수납하는 편이다. 그런데 마음을 준 영화가 너무도 많은 나머지, 책장이 빽빽해 그중 하나를 빼들기가 힘이 든다. 그만큼 좋아하는 영화가 많은데, 그중 일본 영화의 비율은 적은 편이다. 잔잔한 울림을 주거나 킬링타임용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마음속 깊게 박히는 인생 영화로 꼽기엔 어딘가 약간 모자란 느낌이 있어서다.(나카시마 테츠야의 작품은 제외!) 하지만 마음속 책장에서 가장 잘 보이는 줄에 위치한 일본 영화가 하나 있다. 바로 이와이 슌지의 <하나와 앨리스>다. 


    

바다로 향하는 마크, 하나, 앨리스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이 된 두 여자아이의 성장 스토리다.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고 연애 문제로 얽히긴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장르를 로맨스보다는 성장 드라마로 정의하고 싶다. 특히 영화 중후반부에 몰아치듯 피어난 앨리스(아리스가와 테츠코)의 성장통이, 단숨에 <하나와 앨리스>를 내 인생 영화로 등극하게 만들었다. 


오디션에서의 앨리스

영화 속 앨리스는 말 그대로 '좋은 게 좋은 거'인 아이다. 예쁘장한 외모로 길거리 캐스팅을 당한 앨리스는 작은 에이전시와 계약한다. 회사를 통해 여러 일을 소개받고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앨리스. 하지만 연예계 쪽 일을 하기에는 너무나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앨리스는 번번이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 앨리스의 이다지도 비야망적인(?) 면모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 걸까.


앨리스는 이혼 가정의 아이다. 아빠와는 떨어져 산지 꽤 된 듯싶고, 앨리스의 엄마는 잘생긴 애인 만나기에 여념이 없다. 영화의 몇 장면으로 미뤄 봤을 때, 집안 살림 또한 앨리스가 도맡아 하는 걸로 보인다. 하지만 앨리스는 꽤나 어른스러운 딸이다.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친 엄마와 엄마의 애인을 위해 자리를 피해 주고, 데이트 후 늦은 귀가를 하는 엄마를 위해 맛있는 저녁도 차린다. 더불어 "간섭하긴 싫지만, 연애는 결혼을 생각하고 하라"는 애늙은이 같은 조언도 빼놓지 않는다. 


하나의 연애 조작 사건을 도와주는 앨리스

또 다른 주인공인 하나와의 관계에서도 앨리스의 성격은 잘 드러난다. 짝사랑하던 남자 주인공(마크)이 머리를 다친 것을 기회삼아 본인과 사귀는 사이였다고 그에게 거짓을 말한 하나. 어떤 사건으로 거짓말이 들킬 위기에 처하자, 하나는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어필하기 위해 앨리스를 마크의 전 여친으로 둔갑시킨다. 본인의 오디션에선 꿀 먹은 벙어리와 다름없던 앨리스는 하나의 연애 조작 사건에서는 대담한 철판 연기를 선보인다.        


처음으로 속마음을 드러내는 앨리스

하지만 나는 앨리스를 보는 내내 안타까웠다. 앨리스의 어른스러움이 반강제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져도 가져도 더 가지고 싶은 게 당연한 사춘기의 아이. 하지만 앨리스는 엄마를 잃지 않기 위해 엄마의 무심함을 덮어주고, 하나를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속인다. 앨리스의 세계에서 양보는 미덕이 아니라 생존 본능이었던 것이다.    


아빠와의 시간을 보내는 앨리스

<하나와 앨리스>는 특별히 신파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영화가 아니다. 등장인물이 표현하는 감정의 높낮이도 적은 편이며, 비교적 잔잔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앨리스가 아빠와 만나는 장면에서 어김없이 눈물을 쏟고 만다. 아주 오랜만에 보았고, 다음 만남의 기약 또한 확실치 않아 보이는 그런 사이의 부녀. 나는 이들을 보며 내가 아는 또 다른 아빠와 딸을 떠올린다.


한 영화를 보고도 사람들마다 평이 갈리는 건 그들이 살아온 삶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학생일 때 엄마와 아빠는 이혼을 했고, 그 후부터 지금까지 아빠를 만난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앨리스와 아빠가 만나는 8분은 내게 영화가 아닌 지난 앨범을 보는 것처럼 다가온다. 많은 시간을 나누지 못한 이들의 어색함,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대화의 양, 업데이트되지 않은 기억, 원망과 그리움이 섞인 감정, 두 사람을 둘러싼 그 날의 공기 같은 것들이 밀물처럼 몰려와 결국은 눈물에 허덕인다.  


내가 뽑은 최고의 명장면

가족의 상봉이라기엔 다소 밍숭맹숭한 만남을 뒤로하고, 앨리스는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아빠는 딸에게 빈자리에 앉을 것을 권유하지만 앨리스는 아빠와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문 앞에 선다. 그리고 아빠가 가르쳐 준 낯선 언어 뒤에 숨어 조심스럽게, 그러나 진심을 다해 고백한다. '워 아이 니'라고. 


아빠와의 추억이 담긴 카드를 마크에게 선물하는 앨리스

마크는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기억을 찾기 위해 앨리스에게 데이트를 부탁하고, 앨리스는 아빠와의 추억을 마크와의 것처럼 꾸며낸다. 하지만 묵 알레르기가 있는 마크에게 아빠와 먹었던 묵국수를 권유하며 앨리스의 거짓말은 들통이 난다. 결국 모든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마크에게 아빠를 투영했던 앨리스의 환상 또한 끝을 맞는다. 앨리스는 이별에 슬퍼하지만, 결코 절망하지는 않는다. 아빠의 선물(만년필)을 통해 아빠를 추억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앨리스는 마크에게 트럼프 카드를 선물하며 자신을 추억하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앨리스는 이별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앨리스의 아라베스크

아빠, 그리고 마크와의 이별을 전환점으로 앨리스는 한 뼘 더 성장한다. 잡지 모델을 뽑는 오디션장에서 앨리스는 평소처럼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잠시 후, 뭔가 결심한 듯 앨리스가 말한다. 


"제대로 춤춰도 되나요?"  


앞서 친구들과 장난치듯 발레를 추던 모습과 달리, 엔딩에서의 앨리스는 프리마돈나처럼 우아한 춤을 선사한다. 더 이상 우물쭈물하지 않고 거침없이 춤을 추는 앨리스의 모습에, 아빠에게 진심을 말할 때 흘러나왔던 BGM '워 아이 니'가 변주되어 다시 한번 흐른다. 미운 오리 새끼에 가까웠던 앨리스가, 성장통을 겪고 한 마리 백조로 태어나는 순간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그리고 감히, 성장통을 그린 영화 중 이보다 완벽한 결말은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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