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사 Dec 30. 2020

절망과 희망 사이, 그 어딘가의 하이틴 <그랜드 아미>

그럼에도 위로가 되는 이유

* <그랜드 아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통의 하이틴 장르에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이 있다. 가령 영상의 오프닝에는 꼭 2000년대 감성 팝락이 흘러나오고, 등교 첫날 겨우 지각을 면하는 주인공의 모습. 이후 줄거리도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모범생에서 퀸카(혹은 킹카)로 변한다든가, 학교에서 동경의 대상으로 자리잡은 인물과 사랑에 빠진다든가, 앞서 말한 사랑을 시기하는 음해 세력(?)의 함정에 빠진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이런 요소들은 대대손손 내려오는 하이틴 장르만의 암묵적인 룰이다. 가끔은 인물들의 얼굴과 이름만 바뀐 것 같은 기분이 들어도, 여전히 재밌기는 하다. 옛 민담이 아무리 줄거리가 비슷비슷하다 해도 조상님들이 열광했던 것과 같다.


어느 날, 나는 조금 이상한 하이틴 드라마를 만났다. 요즘 거의 '배고파'와 비슷한 빈도수로 말하는 '넷플 뭐 보지'를 듣던 친구가 웬 하이틴 드라마를 추천해 준 것이다. 한 가지 의문점은 그 친구가 온갖 고어와 공포, 미스터리물에 심취해 있는 사람이라는 거였다. 10대 로맨스는 취급도 안하는 INTP(참고로 나는 MBTI에 진심이다)의 하이틴 드라마 추천이라... 일단 흥미로웠다. 퇴근하자마자 넷플릭스 검색창에 '그랜드 아미'를 검색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그랜드 아미>


그런데 이건 달라도 정말 달랐다. 눈앞에 펼쳐진 건 핀터레스트 감성으로 꾸며진 주인공의 방이 아니었다. 구석구석 지저분하고, 욕설이 난무하는 학교의 여자 화장실이 화면을 메웠다. 날 것 그대로의 첫 인상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압도적이었다. 왜 여태까지 이 드라마를 듣도 보도 못했던 걸까?


만약 얼굴은 예쁘지만 평범한 취급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는 여자 주인공이 학교 최고의 킹카, 럭비부, 재벌 아무튼 지 좋은 거 다 하는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스토리를 기대한다면, <그랜드 아미>를 추천하지 않는다.


다만 [갈등, 현실, 사회, 우울, 상처, 극복…]과 같은 키워드에 끌린다면 높은 확률로 이 드라마에 빠질 것이다. <그랜드 아미>에서는 젠더, 인종, 성폭력, 동성애, 가난과 같은 사회문제가 가감없이 드러난다. 이러한 문제들이 극의 흐름을 이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트리거가 될 수도 있을 정도다.)



할 말은 많지만…


이 심상치 않은 드라마는 1화부터 빅 이벤트를 선사한다. 바로 '폭탄 테러'다. 학교 근방에서 누군가 폭탄을 터뜨리고, 아이들은 교사의 지시에 따라 대피한다. 아이들은 여전히 산만하고, 그들을 비추는 형광등의 푸른 빛에는 애매한 긴장감이 감돈다. 학생들의 피해없이 비상 상황은 풀리지만, 극의 분위기는 어쩐지 어수선하고 여전히 불안했다. 마치 이건 서막에 불과하다는 듯이. 꼭 무언가 더 남아있을 것 같은 찝찝함이 들었다.  


하이틴 드라마 오프닝에 쓸 수 있는 하고 많은 상황 중에 왜 하필 폭탄 테러일까? 그러고 보니, 시즌의 마지막 쯤에도 폭탄 테러 상황이 등장한다.(등장인물 중 한 명의 자작극이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폭탄 테러라는 사건이 관통하는 것이다.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폭탄이 주는 중압감이 너무나 컸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랜드 아미>에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도미니크, 갑작스럽게 성정체성을 발견한 인도계 미국인 싯다르타, 한순간의 장난으로 위기를 맞게 된 오언과 제이슨, 유대인이지만 유대교는 아닌 부모에게 입양된 중국계 미국인 레일라. 그리고, 베스트 프렌즈라 생각했던 친구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조. 비록 한 줄로 간략히 상황을 설명했지만, 그들 각자에게는 폭탄과 다름없는 현실이다.


 폭탄!


폭탄 테러는 아이들이 닥친 현실의 문제를 시각화한 거였다. 차별, 폭력과 같은 문제는 누구에게나 폭탄이다. 그앞에서 안전한 대피소란 없다. 첫 에피소드를 장악한 폭탄 테러 사건은 아이들이 겪을 무서운 현실을 넌지시 알려 준 것이고, 마지막의 폭탄 테러 사건은 이 문제들이 쉬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란 걸 암시하는 게 아닐까.        


 

도미니크, 행복해야 해.


우울한 감정이 드라마를 지배함에도 제목에 희망을 넣은 이유는, 이 드라마가 단지 문제를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미니크는 어떻게든 살아 내려 발버둥치고, 싯다르타는 끊임없이 부정해 왔던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인다. 제이슨은 정학 당한 오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레일라는 상상만 했던 것을 조금씩 행동으로 옮긴다. 그리고 누구보다 상처가 컸을 조는, 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다시 춤을 춘다.


폭탄에 살이 터지고 몸이 짓눌려도, <그랜드 아미>의 아이들은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싸우고, 노력하고, 때로는 발악하며 현실을 타개하려 한다. 몸 위의 고철 덩어리를 한 번에 치울 수 없다 해도, 겨우 손가락 하나만 까딱한다 해도 어떤가? 무력하지 않은 태도만으로 충분히 박수를 받을 가치가 있다. 절망과 희망의 저울에서 영점을 가리키는 눈금이, 부디 시즌2에서는 조금 더 희망에 가까워 지기를 바란다.



P.S. 모두 <그랜드 아미> 보세요!      




작가의 이전글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 <부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