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
나는 누구인가. 직장 관계가 아닌 곳에서 자기소개할 때마다, 직업인으로서의 소개가 아닌 ‘나’에 대해서 설명하기가 어렵다. 직장 관계에서야 간단하게 조그마한 직사각형의 종이 한 장으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 이름. 직위. 핸드폰 번호. 이메일 주소 등 작은 종이 한 장으로 그 사람의 회사 내 위치까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직장인으로서 소개하지 못할 때는 둘러싸인 관계로 표현한다. 몇 개월 된 아기가 있고, 결혼 몇 년차이다. 종이나 관계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까. 혹은 어디에 사는지가 나를 말할 수 있을까? 첫 만남에 어디에 사냐고 의례 묻는데, 동네 이름이 아닌 아파트 이름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나 아는 대장 아파트 이름만으로도 자신을 설명하기 충분한 걸까. 나는 누구일까.
살아오면서 해왔던 일이 나를 말할 수 있을까. 직장인은 경력이 될 수 있겠다. 이번에는 작은 종이가 아닌 A4 사이즈 종이 몇 장으로 이력을 설명할 수 있겠다. 회사에서 해 온 업무들은 보통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렇다면 회사 밖의 인생에서 선택해 온 결정들이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까.
인생에 살아가면서 선택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시기는 언제인가. 청소년기에는 선택의 폭이 크지 않은 것 같다. 성인이 된 이후,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큰 선택이라면, 학교를 여러 군데, 오래 다녔다는 것. 아파트 이름이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것처럼. 대학교 이름이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나서 보면 원하는 대학교에 갔기 때문에 밥벌이를 하는 건지. 그것과 상관없이 지금의 밥벌이가 내 밥그릇인 건지 알 수 없다. 마치 학원과 과외를 했기 때문에 학업 성취능력이 일정 수준에 도달한 건지. 외부 도움이 없어도 내 학업성취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과 같다. 가지 않은 길이라 알 수 없지만, 항상 의문이 드는 지점이다. 선택의 결과가 아닌 선택의 과정만 본다면, 나는 하고 싶은 걸 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좋아하는 것들이 나를 말할까. 책 읽는 것. 책 안에서 나와 비슷한 점 혹은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관점을 찾는 것, 좋은 문장을 기록해 놓는 것. 고요하게 명상하고 난 뒤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을 인지하는 것, 향기로운 차를 마시는 것, 화려한 바다 뷰를 바라보며 층층에 티푸드를 쌓아두고 마시는 애프터눈 티, 바스락거리고 따뜻하지만 무겁지는 않은 호텔 침구를 덮은 채로 에어컨을 틀어 노천탕처럼 밑에는 따뜻하게 위에는 살짝 한기를 느끼며 자는 것, 아이패드를 들고 아침 8시에 여는 카페에 가 일정 관리나 글을 쓰며 365일 여유로운 프리랜서인 척하는 것, 구하기 힘든 한정판 토분을 극적으로 구매했을 때, 새로운 식물을 한정판 토분에 심어주고 하얀 배경에서 인증샷을 찍는 것, 식물들이 연둣빛의 신엽을 내어주며 잘 살아 있다고 티 내는 것, 마음에 쏙 드는 음악과 분위기를 만났을 때, 좋은 사람들과 생산적인 대화를 하거나 선한 영향력이 선순환될 때, 딱 필요한 정보와 도움을 받거나 주게 되었을 때, 차가운 마음마저 녹이는 맛있는 음식을 접할 때, 인사이트를 주거나 내적 변화를 일으킬만한 문구나 상황을 맞이할 때.
죽을 때까지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것. 죽기 전에 내가 누구인지, 어떤 걸 좋아하고 왜 좋아하는지 확신에 차서 타인에게 몇 시간이고 털어놓을 수 있는 것. 살아가면서 죽음을 항상 상기하면 삶의 소중함을 더 느낄 수 있듯이, 존재 이유를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삶이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