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재현 외 7인, 『좀비낭군가』
언젠가부터 사람들에게 공식적인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 대해 제멋대로 규정하고 판단해 버릴 거라면 차라리 내가 진정으로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 편이 낫겠어. 되도록이면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느꼈던 불편함을 역으로 이용하여 겉모습만 보고 나를 함부로 판단했으면 할 때가 있다. 그래,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아. 가끔은 사람들에게 가볍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비춰지고 싶고, 그리하여 그들의 기억 속에서 나의 실재적인 모습은 쉽게 잊혀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때로 쉽게 잊혀진다는 것은 나를 위험으로부터 쉽게 보호할 수 있는 방패막이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나는 추억을 모으지 않는 편이다. 나는 기념일에 찍었던 사진이나 친구들에게 받았던 편지, 여행지에서 사 왔던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쉬이 여기고, 가볍게 버릴 줄 아는 사람이다. 내 방에는 꼭 필요한 물건만 있으며, 그마저도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청소와 정리로 묵은 생각을 정리하는 편이다. 버릴 물건들을 자꾸만 골라낸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할 때마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이해하지 않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게 아무도 왜 그렇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는다. 친구들로부터 왜 그렇게 매정하냐고 장난스런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때로 그 말에 상처를 받곤 한다. 진짜 중요한 건 물성을 보관하는 것이 아닌데.
태재현, 최영희, 서재이, 정예진, 경민선, 전효원, 정아미 작가의 『좀비낭군가』는 좀비를 주요 소재로 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은 썩어가는 내면에서 피어난 ‘들끓는 포기’를 역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표제작인 「좀비낭군가」는 과거시험을 보러 간 남편이 장원급제는커녕 기녀와 함께 좀비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조선시대에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남편을 기다리며 정절을 지키는 일반적인 서사 구조와 다르게 이 작품은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한다. 한양으로 떠난 남편의 생활은 마을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근사하게 생각했던 것만큼의 가치를 지니진 않았던 것 같다. 끝내 인간이기를 포기한 채 좀비가 되어 망르 사람들을 공격하던 그는 ‘정의’에 대해 묻는 아내의 질문에 대답을 회피한 채 ‘권력’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하기 시작한다.
한편 아내는 믿었던 남편으로부터 ’이미 버림 받은 몸, 정절이나 지키며 시어머니를 모시라‘는 폭력적인 언행을 직접적으로 들은 채 도저히 자신이 속한 세계를 탈출할 방법이 없어 ’과부살이‘나 다름없다는 주변 청년들의 희롱을 견뎌내고, 아들에 대한 자의식으로 꽉 찬 시어머니를 모시며 언제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활쏘기를 연마하게 된다. 이 작품이 재밌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제도의 모순과 부조리한 사회의 병렬 구조 앞에서 남편이 저항을 포기한 채 ’악‘을 택한다면, ’나‘는 순응적인 여성이기를 포기한 채 ’주체적인 삶‘을 택한다. 두 인물 모두 신념을 잃었다는 지점과 그로 인한 억울함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즉 생의 변화를 이끌어낸다면 보다 희망적인 메시지는 ’주체성‘이 끝내 ’악‘을 이긴다는 지점이다.
수록작 중 서재이 작가의 「메탈의 시대」 또 어떤가. 밸지’의 포기는 평생의 꿈이었던 ‘록 밴드를 떠나는 것이다. 수년째 무명 생활을 하며 어떤 사람들은 밸지에게 ’록 스피릿‘이 없다는 추상적인 감상들을 늘어놓는다. 밸지는 이러한 시선과 태도에 서서히 꿈을 통제당한다. 꿈을 향해 나아가는 일에 규정된 시선이나 정답은 없으나 때로 그는 중심을 잃고 타인의 가벼운 말 한마디에도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로 인해 오랜 기간 억울함을 품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작품에서 좀비 바이러스가 상징하는 지점은 운명에 의해 통제될 수밖에 없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어 좌절되는 어려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살을 물어 뜯기고,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그르렁거리는 신음소리를 뱉지만 밸지는 그럴수록 정신이 또렷해진다. 다다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더 이상은 해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할 수 없어 고통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상태. 세상에 의해 제멋대로 규정된 시선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밸지는 끝내 ’포기‘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게 되지만 그의 포기는 여전히 ’들끓고‘ 있다.
그가 포기한 것은 결코 원론적인 목표이자 꿈이 아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틀에, 고정관념에 자신을 맞추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세상에 자신을 맞추지 않는다. 자신에게 세상을 맞춰야만 영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부정당하는 몸으로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내달린다. 이 작품에서 ‘밸지’가 확산하는 것은 더 이상 바이러스가 아니다. 이것은 스스로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동력’이 될 것이다.
요즘 나는 ‘고정’과 ‘관념’에 대해 생각한다. 실존하는 ‘고정’과 실존하지 않는 ‘관념’의 모순에 대해. 사람들이 나를 봐주었으면 하는 ‘고정’과 그 자체로 가변적인 ‘관념’에 대해. 관념이 부질없다고 믿는 이유는 관념은 영원하지 않으며 단 한순간도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손에 잡히지 않고 매초마다 다른 결과값을 내는 관념을 실존하는 것으로 매어두기 위해 때로 우리는 ‘고정’이라는 프레임을 씌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계는 너무도 알 수 없어 정신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니 중요한 건 물성을 보관하거나 타인에 대해 함부로 규정짓지 않는 태도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면 프레임 안에 비춰지고, 프레임 밖으로 나가는 시도들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중요한 건 내가 나를 감당해 낼 줄 아는 방법을 기르는 것. 세상에 나를 맞추기보다 나에게 세상을 맞춰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썩은 내면을 벗어나기. 진정한 탈출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 본 서평은 출판사 황금가지와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