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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주 Jan 12. 2024

내 뒤에 숨어라, 이 새끼들아

진설라, 『메모리얼 향수가게』

  오래전에 어느 프로그램에서 백조 가족을 본 적이 있다. 할아버지 넷이 여행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호숫가였던가, 강가였던가. 잔잔하게 물결이 이는 수면 위로 백조 세 마리가 우아하게 헤엄을 치고 있었다. 어른 백조 하나에 새끼 백조 둘. 할아버지들은 백조가 참 예쁘다며 감상에 빠진 채 한참 동안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백조 가족이 다른 동물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되었는데, 그 장면을 보자마자 나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른 백조는 제 날개를 활짝 핀 채 새끼 백조를 제 뒤로 감추었다. 어디 한 번 공격을 해볼 테면 해 봐. 그렇지만 내 새끼에겐 상처를 줄 수 없어. 그러니 내 뒤에 숨어라, 이 새끼들아. 그 장면을 보는데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당시에는 왜 그런 것들을 보면 눈물을 흘리나 했는데 최근에 나는 그 이유를 명징하게 알게 되었다. 부러웠던 것이다. 그 새끼들이 너무도 부러웠던 것 같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스스로 해결하기에 어려워 결국 스스로를 무너뜨리게 만드는 고난이 닥칠 때가 있다. 이곳은 지극히 인간의 세계이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관계를 더듬어 가다 보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최선을 결정을 내리거나 선택하기 어려운 순간도 무수하다.      


  그럴 땐 가끔 내게도 어른 백조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지금껏 마음이 무너지는 속도가, 감정이 헐거워지는 시간이 조금 유예될 수도 있었을 텐데. ‘네가 알아서 해.’, ‘나보단 네가 더 선택을 잘하잖아.’ 따위의 말을 들을 때면 때로 내가 가진 불안을 적정량 이상으로 넘치게 만들었다. 불확실성이라는 건 긍정적일 땐 한없이 에너지를 전달받을 수 있지만 부정적일 땐 사람을 고목처럼 말라 죽이기도 한다. 오직 나만이 그것을 안다.


  진설라 작가의 『메모리얼 향수가게』는 ‘괴로움의 고독’을 촘촘하게 파고드는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사랑의 정서’에 대해 생각했다. 감정과 정서를 다룬 대부분의 작품은 이별을 시작점으로 두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좋은 이별을 꿈꾸기보단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랑’의 시작에 운이 실리길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여유 없음에서 오는 성급함, 즉 욕심이라 함부로 단정짓겠다. 한편 그리운 사람, 떠나보낸 사람을 향수라는 흔적으로 남긴다는 설정은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준비되지 않은 ‘작별’ 앞에 괴로움을 겪는 이들에게 마음을 유예시킬 기회를 내어준다.       


  첫 번째 에피소드였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피어나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이 작품에서 가학의 위치에 있는 것은 17세의 희주라는 인물이다. 희주는 학교폭력의 피해자로 투신자살로 죽어버린 인물이다. 희주의 죽음은 부모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희주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향수’를 매개로 부모 앞에 나타난 그는 부모의 마음에 남은 고통을 덜어가려 한다. 스스로의 평화를 위해 선택한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가학’이 된 것을 인정한 것이다. 역시나 인생에서 어떤 선택은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나 최악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고독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남겨진 사람이 아닌 떠난 사람의 정서를 함께 다루고 있다는 지점이었다. 흔히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평면적인 설정과 메시지를 과감히 깨부순 것이다.        


  향수는 관념적인 의미로 '그리움'을 의미한다. 그러나 물성으로 변환하자면 흩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움은 시간이라는 속성에, 그리고 무한한 공간이라는 제약에 점점 사라져갈 것이다. 그러나 사라진다고 하여 모든 것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매 에피소드에서 그리움보다 괴로움의 고통을 더 크게 느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괴로움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괴로움을 주었다는 ‘가학-피학’의 전복 구조 앞에서 마음이 더 쓰이는 쪽은 개인적으로 가학의 고독이었다.     


  영혼이 된 이들은 이승의 존재에게 무엇도 행할 수 없다. 그저 관념하고 단념할 뿐이다. 이 작품은 언뜻 보면 남겨진 사람의 상처를 회복하는 서사로 풀이되는 것 같으나, 내가 생각하기엔 떠난 사람의 아픔을 돌보는 이야기 같았다. 때로 악인도 상처를 받는다. 악인의 순수성은 여기서 발현된다. 적어도 진정한 악인은 자신의 악행을 인정할 줄 알기 때문이다. 즉, 행한 자는 행했기 때문에 그 자체로 고독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쾌한 체험이 아니다.  이처럼 향수는 휘발되는 것이 아니다. 향수는 시간 속에 배어드는 것이다. 그리움은 결코 소멸될 수 없다. 세월 속에 기억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작품이 『메모리얼 향수 가게』인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      



* 본 서평은 출판사 팬덤북스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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