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소, 『중국 인문 기행』
최근에 나는 목소리만으로 한 사람을 온전히 감각해야 했다.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으며, 손끝으로 더듬어볼 수도 없어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상상해 봐도 생김새가 그려지지 않아 도무지 결을 알 수 없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시케의 마음을 이해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자리에 육신은 없고 단지 허영으로 둘러진 유속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엔 어이쿠야, 내가 실은 미쳐버려 환청을 듣고 있는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단어와 단어 사이 뱉어지던 호흡과 기분에 따라 높낮이가 달라지던 목소리. 감탄사와 헛기침. 하하, 하고 터져 나오던 웃음소리와 당황스럽거나 난감할 때 쩔쩔매듯 긴장감이 감돌던 침묵.
이런 것들로 한 사람을 온전히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무엇인가를 확신하고 자신할 수 있을까. 나는 매일 소설을 쓸 때마다 가본 적 없는 세계를 연기한다. 적어도 내가 그려놓은 세계 속에서 나는 늘 옳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을 잘 알지 못하면서 잘 아는 척 둘러대어야만 하는 사람. 그것이 소설가, 헛된 희망을 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서글픈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나는 어느 날엔 내가 사는 세계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적어도 나에 대한 이해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모르겠어. 어느 날의 나는 정답인 것 같고, 어느 날의 나는 틀린 사람 같다. 문제는 내가 나를 못 믿으니 나를 둘러싼 세계, 타인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겉으로 드러난 내 모습만 보고 제멋대로 내 인생을 단정지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관념적인 것들은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오래도록 그래왔다. 그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만리장성을 눈앞에서 본 경험이 있다. 비가 많이 오고,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이었다. 흐릿한 안개와 구름 사이 초록의 산등성이를 타고 끝없이 이어지던 성벽을 기억한다. 어찌 이렇게 거대하고 웅장한 것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을 어떻게 인간이 만들었을까.
무려 14년 전의 기억이다. 눈으로 직접 보고, 호흡으로 느끼고, 손끝으로 감각한 그것은 내 기억 속에 평생을 남을 것이다. 그러나 더 명확하게 말하면 내가 기억하는 것은 ‘만리장성’이라는 성벽보다는 그 길을 걸으며 빗길에 미끄러지고, 손에 들고 있던 음료를 떨어뜨리고, 우산이 뒤집어지고, 알 수 없는 이국의 언어들이 귓등을 때리고 가던 그런 찰나의 순간들이다. 즉, 그 여행에 담긴 이야기라는 뜻이다. 모든 역사에는 스토리가 겹겹이 배어 있다.
송재소 작가의 『중국 인문 기행』은 사천을 둘러보며 건축과 풍류에 담긴 이상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내밀한 스토리를 힘 있게 풀어낸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소가 있다면 상도관과 천사동이었다. 도교의 수련장소인 천사동에 위치한 천사전은 ‘장릉’이 수련하던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心淸水濁/山矮人高(마음은 맑고 물은 탁하며, 산은 낮고 사람은 높다’는 대련이 있다. 작가는 이를 사람의 마음이 매우 맑아서, 투명함의 대명사인 물조차 탁하고 그에 사람의 심성이 깊어 보이니 오히려 산의 높이가 우습게 보인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여행지를 돌아보는 동안 작가는 문화사적으로 규정된 시선 외적인 요소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시작부터 끝까지 주체성을 잃지 않는 여행기. 한 사람의 세계관을 오롯이 더듬어 볼 수 있는 향유의 장인 것이다.
프시케는 에로스가 구축한 세계관에 의해 모든 주체성을 통제당한다. 프시케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남편인 에로스뿐인데 그녀의 유일한 세계관인 에로스는 ‘불확실성’이라는 관념으로만 존재한다. 신적 존재로 ‘프시케’라는 세계관을 구축하던 에로스가 간과한 것은 그녀가 주체성이 있는 ‘인간’이며,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배우자’라는 사실이다. 에로스는 프시케를 너무도 얕잡아 본 듯하다. 프시케가 불확실성에 1을 곱해 ‘불확실성’이라는 물성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더 이상 신에게 무엇도 의지하지 않기 위해 그녀가 내보일 수 있는 최선의 선택, 즉 주체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프시케의 의심은 에로스의 배신을 곧바로 불러일으킨다. 이후 자신이 만들어놓은 세계를 도망치듯 버리고 떠난 에로스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감상적인 면면을 보여준다. 프시케는 자신이 지닌 모든 패를 꺼내 보이고, 에로스는 프시케가 실수로 떨어 뜨린 촛농에 고작 어깨의 상처 하나만을 (의도치 않게) 들키고는 어머니인 비너스에게로 종종 거리며 사라진다. 끝내 비너스를 찾아가 남편을 만나게 해달라며 죽음의 협곡을 넘는 쪽 역시 멋대로 한계를 규정지어 버린 오만한 신이 아닌, ‘다음’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이다.
기행을 읽는 것은 결국 눈앞에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책’이라는 신적 세계관에 의해 시선과 감상을 통제당한 채 한 사람의 이야기를 오롯이 감각해야만 하는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보광사부터 낙산대불까지. 작가가 눈으로 보고, 맛보고, 향유한 이야기들엔 장소에 배어든 실제적인 감상과 역사적 기록이 균형감 있게 전개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명명되는 것들에 대해 골몰해 보았다. 시조와 풍류에 깃든 수만 가지 단어에 대해. 적어도 명명된 세계 안에서는 주체성을 잃겠지만 작가를 따라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낀 이야기들을 통해 그곳에 ‘그것이 있다’는 ’불확실성‘ 자체를 확신한 순간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이 이야기의 ’다음‘이 궁금한가? 그렇다면 지금 사천으로 직접 떠나보는 건 어떨까?
* 본 서평은 출판사 창비와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