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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주 Feb 02. 2024

변수

프랑수아즈 사강, 『엎드리는 개』


이성을 보는 단 한 가지 기준이 있다. 막내가 아닐 것. 살아오며 많은 막내에게 배신을 당했다. 특히나 가족들. 우리 집에선 나를 제외한 모두가 막내다. 막내들은 어리광이 심하고 참을성이 없다. 결정적인 순간에 회피 성향을 보인다. 특히 막내끼리 싸우면 끝이 없다. 별 말 같지도 않은 걸로 삐지고 싸우고, 그걸 어르고 달래는 쪽은 때로 자식이지만 첫째인 내가 되기도 했다. 신라면과 안성탕면 중 무엇을 먹을지로 싸우고, 선덕여왕과 축구 경기를 보는 걸로도 싸우고. 선풍기를 놓는 방향으로도 겁나게 싸웠다. 막내들은 나고 자라면서 늘 이해만 받을 뿐 타인을 향한 이해심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가. 우리 집 막내들은 무지하게 싸웠다. 공교롭게도 회사 팀원 여섯 명도 막내다. 그들도 그들끼리 어처구니없이 싸운다. 나는 막내들이 정말로 질린다. 그러니 애인 하나 만큼은 첫째를 고르고 싶었다. 다른 조건은 보지도 않았다. 무조건 첫째! 첫째! 첫째일 것!

 

한 가지 더. 각박하고 피로한 이 세계에서 기댈 구석 하나쯤 있었으면 했다. 씩씩하게 자란 첫째지만 나도 한 번쯤 회피할 수 있는 ‘품’이 있었으면 했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에게는 막내 동생 취급을 받고 싶었다. 늘 소속된 곳에서 책임을 떠안는 일이, 원치 않게 역할을 맡아야만 하는 일에 사실 나는 많이 지쳐 있는 상태다. 그러니 이성을 볼 때마다 스스로를 막내라고 소개하는 사람을 볼 때면 (상대는 내게 관심도 없는데) 마음이 팍 식었다. 나는 직관력이 매우 좋은 편이다. 피곤해서 모르는 척 할 뿐이지 눈치도 빠르고, 상황이 돌아가는 판을 잘 이용할 줄도 안다. 그러니 내 인생은 대체로 변수가 없는 편이다. 예측한 대로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첫째에 대한 나의 신념이다. 나는 나의 판단에 자신과 확신과 부심이 있었다. 이것을 과거형으로 이야기하는 이유는 최근에 나는 변수를 만나버렸기 때문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엎드리는 개』는 인생의 ‘변수’를 다룬 작품이다. 지지부진하기만 한 게레에게 날아든 가죽 주머니는 그의 인생에 찾아든 변수다. 변수는 사전적으로 어떤 관계나 범위 안에서 여러 가지 값으로 변할 수 있는 수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의 삶에 변수를 일으킨 것은 보석도, 살인사건도 아닌 그에게 날아든 가죽 주머니를 열어보는 행위 자체다. 가죽 주머니는 그에게 닥쳐온 ‘운명’을 상징한다. 운명은 때로 행위하지 않으면 스쳐지나 가버린다. 그러나 그가 가죽 주머니를 연 순간, 그리고 그 안에 고가의 보석이 있음을 인지하게 된 순간 그것은 그의 인생을 바꿀 절호의 ‘기회’가 된다. 사강은 인생의 변수를 사랑으로 해석한다.

 

자신의 손에 든 것이 보석이라는 것을 인지한 순간부터 게레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확연히 달라진다. 그는 자신의 또래 애인이었던 니콜이 아닌 한 세대는 위의 시절을 살아가고 있는 마리아에게서 사랑을 느낀다. 이 소설에서 게레의 욕구는 마리아로 하여금 진정한 남성성을 발견하는 데 있는 것 같다. 마리아의 성욕을 완벽하게 채워주고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은 작품 밖의 시각에서 바라보기에 그리 대단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적어도 게레 자신에게만큼은 신념이다. 그는 마리아에게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노력을 하게 된다. 거짓으로 니콜을 데려와 마리아를 자극하듯 섹스를 연기하고 그녀가 바라는 이상형인 갱단의 두목처럼 명예를 채워주기 위해 살인사건의 진범이 되고자 한다.

 

마리아 역시 일순간 자신에게 날아든 변수를 당혹스러워한다. 그녀는 일찍이 자신의 허영과 명예 욕구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이제 갓 스물일곱이 된 게레에게서는 한 끗도 찾아볼 수 없는 마초적인 남성성을 갈구하는 인물이다. 현재는 그때의 시절에서 내려와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을 살아간다. 누군가에게는 평온한 일상일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현재의 삶에 권태를 느낄 뿐이다. 마리아는 이러한 지지부진한 옥살이를 견디며 언제고 자신의 삶을 구원해줄 사랑을 기다려왔다. 그랬기에 자신을 찾아온 사랑이 겨우 갓난아기 같은 게레라는 사실을 오래 인정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신념을 내세우며 운명을 부정하고, 때로는 그 좌절감을 게레를 조롱하는데 쓰게 된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게레를 향한 자신의 직관이 틀리지 않았음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를 받아들인다.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음성 언어로 내뱉음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신념이 바뀌었다는 것을 비로소 인정해버린다. 나는 마리아를 보며 진정한 구원은 불변할 것 같은 신념이 해방되는 것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나는 게레와 마리아를 보며 인간은 왜 이렇게 하찮은 것에 집요하게 마음을 쓰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인생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감상적인 것들은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나 역시 첫째를 찾을 것이 아니라, 첫째에게 기댈 것이 아니라 사실은 스스로 마음에 든 멍을 치료했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러니 첫째든 막내든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지. 때로 신념은 인생의 변수 앞에서 또 다른 방향성을 향해 나아가는 유속성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것 하나쯤은 인간적으로 원해도 되는 거 아니야? 동생이 되고 싶은 마음 말이야.)

 

막내에 대한 나의 깊은 불신은 여전하다. 막내들을 지켜본 결과, 막내들에게는 역시나 공통된 특성이 있다. 막내들은 내게 관심을 끌기 위해 자신의 억울함을 늘어놓고, 풀어놓는 편이었다. 그것으로 동질감을 형성하려는 특징이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동질감이 아닌 편안함이었는데. 그것을 처음으로 채워준 사람은 공교롭게도 첫째였다. 번지르르하거나 부가적인 설명 없이 ‘괜찮아, 이대로도 좋아.’라는 말 한마디로 정리가 되던 그런 순간들. 그때의 인상을 기억한다. 내내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기억을 ‘둘째’라는 변수가 주체적으로 씩씩하게 찾아와 조금씩 깨부수고 있다. 둘째는 살면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카테고리였다. 첫째 같기도, 막내 같기도 한 모습이 있는 둘째는 마음을 참는 사람 같았다. 첫째와 막내 사이. 견디고, 억누르고, 인내하는 성정을 지닌 사람. 첫째의 듬직함과 막내의 장난스러움(과 어리광)을 모두 갖춘 사람. 재밌는 사실을 발견하면 동생처럼 머리맡으로 찾아와 재잘재잘 늘어놓는 사람,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게 어려운 면면들을 멋지게 해결해주고는 칭찬을 갈구하듯 나를 돌아보는 사람. 그러고 보면 이런 성향들은 애초에 순서의 문제라기보단 그저 한 인간의 생에 담긴 무게의 문제인 것 같기도 해. 아니, 실은 이제 나도 앞으로 내게 벌어진 일들을 하나도 모르겠어. 이래저래 내가 짜놓은 판에서, 목을 쭉 빼며 외동을 찾아볼까 하고 생각하던 가운데 갑작스레 등장해 버린 타이밍도 너무도 변수였던 둘째. 첫째가 아니면 안 된다고 몇 번이고 다짐하면서도 그 다정함에 눈 한 번만 딱 감고 한 번 끌려다녀볼까 싶기도 해. 이 변수의 결말이 궁금한가? 그렇다면 우리 다음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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