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사 편집부, 『한국문학 318호』
요즘 나는 ‘일’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일’이라는 존재가 나에게 묻는다. 너 내가 왜 좋니. 정말로 나는 왜 일을 좋아하는 걸까. 일을 좋아하기는 하는 걸까. 일이 나의 무엇을 채워주기에 나는 온종일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일을 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나는 단지 일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것 같은데, 그 이유를 따져보자면 무어라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다. 그저 일은 사랑스러운 존재, 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내가 처음 선택한 ‘일’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당시 내가 일을 선택할 때의 기준은 스스로 경제적인 독립을 할 수 있는 것. 그리하여 가정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원했었다. 부모의 품으로부터 주체적으로 나아가고 싶었던 것 같다. 주체적인 사람은 스스로만 감당하면 되기 때문이다.
도움받는 기분은 영 별로다.
나약하게 기대는 것은 치욕스럽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오래도록 썩 유쾌하지 않았다. 만족스러운 일에는 늘 ‘도움 받는 기분’이 뒤따른다. 그렇기에 도움받는 기분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는 조금 고통스럽더라도 고난과 외로움을 견뎌야 할 때가 있다. 나는 경제력을 갖는 것을 가장 원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먼저 취업을 하게 되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쉴 틈 없는 해를 거듭하며 7년 차 직장인이 된 지금, 나는 내가 선택하고 포기한 것들에 대해 자꾸만 되짚어보곤 한다. 취업 대신 습작기를 조금 더 가졌다면 어땠을까. 그때 나는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지금의 나는 무엇을 먼저 얻을 수 있게 될까. 내가 지금 일을 대하는 자세는 무엇인가. 여전히 돈인가, 꿈인가, 아니면 즐거움인가. 호모루덴스. 이것은 한국문학사 편집부, 『한국문학 318호』의 키워드다.
한국문학사에서 발행하는 문예지 『한국문학 318호』은 시와 소설, 비평 등 동시대성을 지닌 한국문학의 장르를 한 권의 책으로 풍부하게 즐길 수 있다. 펴내는 말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자본주의의 시작에 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일하는 본성이 있다는 ‘호모파베르’적 관점이 있었다면 2020년대에 돌입하며 인공지능이 활약하는 포스트 산업사회에서는 노는 인간, 즉 유희적 인간으로의 ‘호모루덴스’가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확신을 가지고 언급할 수 있는 지식은 없으나, 분명 인공지능은 인간의 삶을 더욱 여유롭고 윤택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한편으로는 지금껏 인간만의 세계에서 해결할 수 없었던 이슈를 과감하게 정의내리는 행보를 보여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희적 인간’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일과 나를 분리하는 것? 일은 AI에게, 쾌락은 더 자극적으로 즐기는 것만이 유희적 인간이 되는 걸까? 유희적인 인간은, 역사 속에서 어떤 인간으로 기억될까? 지난 역사에서 유희적 인간은 그리 유쾌하게만은 해석되지 않았던 것 같다.
수록된 박규현 시인의 시 <직진하는 빛바램의 끝에 있는>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숲을 선물 받고 싶’다는 나에게 ‘나무로 책장을 짜주는 너’는 숲을 원하는 나에게 ‘볕이 들지 않도록 늘 커튼을 친다. 방안은 자연적으로 습기가 가득해지고, 곰팡이가 피기 시작하지만, 자연적으로 ’하루살이 떼가 서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시적 상상력에 기대어 보면 숲을 원하는 나는 도시에서 만족을 추구하는 너를 그저 바라본다. 어딘지 모르게 쉴 틈 없이 바빠 보이는 너. 나는 너그럽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잠든 너의 머릿결을 빗어주고, 네가 짜놓은 나뭇결의 책장 사이 먼지를 털어내 주는 것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꿈속에서 너는 사랑받고 있을 것이고 일어난 이후에도 그런 삶이 지속될 거라는‘것을
’너는 모른다. 모르고 있다‘라고.
그 밖에도 작품을 읽으며 나는 유희적 인간에 대해 생각했다. 어쩐지 유희적이라는 단어는 우아하지 않게 보였다. 단어를 발음할 때마다 인스턴트 같은 가벼움만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호모루덴스의 개념에 속한 ‘유희’라는 표현은 때로는 비인간적이고 각박한 삶 속에서도 느릿한 자연스러움, 즉 여유를 추구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 같다고 생각했다. 더 느릿한 것. 더 자연스러운 것. 숲을 원한다고 당장 숲으로 떠날 수는 없지만, 숲을 보여주기 위해 나무를 데리고 오는 것. 그리고 그런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의 미래는 앞으로 사유하는 시간보다 챗GPT가 정의내리는 답에 점점 의존해갈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면 애초에 그렸던 미래처럼 여유를 즐기기보단 더 애쓰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때로는 ‘유희적 인간’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 주체적으로 ‘자아’를 잃지 않는 것. 내가 나를 돌보고, 나를 깊이 이해하는 것. 그리고 타인을 향해 너그럽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는 것. 이번호의 주제 “호모루덴스”가 가리키는 방향은 결국 “주체적인 인간의 사랑과 이해”를 의미하는 것이다. 삶을 사유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삶에서 일과 나를 분리하는 것은 제법 중요하다고. 그러나 나는 일이 단지 경제성만 지닌 것이 아닌 ‘자아’를 깨우는 일이라면 ‘일과 나’를 분리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과 ’물질‘이라는 속성의 제약을 받는 인간이기에 아무리 좋아하는 일을 하더라도 시간에 쫓기고 신체적인 피로도가 높아질수록 ’즐거움‘을 잃어가게 된다. 이번호에서 사유하는 ’호모루덴스‘가 가리키는 것은 바로 이런 모순점으로부터 해결점을 찾아가자는 것이 아닐까.
다시 일에 대해 생각해본다. 분명 내 이름을 걸고, 내 일을 하는 것은 즐겁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은 늘 타인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나의 이야기를, 나의 것을 타인이 보고 나를 기억해 줄 때 기쁨이 차오르는 일. 책을 읽으면서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 또는 커넥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온종일 일을 하는 이유는 심심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이고, 심심하지 않을 때엔 일을 잠시 중단하는 일에 개의치 않는다. 호기심 돋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 탐구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 결국 나의 ‘일’은 말 그대로 그런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유희는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것에 대해 사유한 것을 다시 글로 풀어내는 일. 이것이 경제성을 갖게 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일을 대하는 자세는 바로 이것이다.
* 본 서평은 출판사 <한국문학사>와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