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성』
내가 태어난 1994년엔 집 앞에 있던 큰 다리가 무너지는 사고가 있었다. 이듬해엔 유명 백화점이 무너졌고, 그 이후엔 나라 경제가 무너질 뻔한 큰 사건사고가 연이어 계속되었지. 그렇게 힘겹게 21세기를 맞이할 즈음엔 세상에, 지구가 멸망해버릴지도 모른다는 흉흉한 뉴스가 보도되기도 했다. 하다하다 이젠 지구까지 무너져버리는구나. 세기말이 가까워질수록 무너지고, 멸망하고, 죽어버리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나오자 지금의 내 또래의 연령대였던 엄마와 아빤 인생이 참으로 덧없구나, 하는 생각을 일찍이 했었던 모양이다. 어떤 부모들은 자식에게 원치 않는 성과를 강요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방패 삼아 괴롭히기도 한다던데 우리 가족은 나와 동생이 자라오는 내내 ‘그저 건강하게 자라거라’라는 것 외에는 크게 바라거나 반대하는 것이 없었다. 첫째인 내가 예술 전공을 하겠다고 했을 때도 부모님은 흔쾌히 내가 원하는 것을 지원해주었고, 나는 나중에야 동기들 중에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입학한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 가족은 한여름에 느릿하게 만들어낸 누룽지탕 같다. 알면 알수록 삼삼하기만 해서 가끔은 재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중에 별종인 나는 욕심이 좀 많은 편이다. 가족 중에 유일한 첫째라 그런지 승부사 기질이 다분한 데다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나의 관심 분야에서 대답을 잘하지 못하거나 등수가 밀리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잠을 못 잤다. 강의 외적으로도 교수님을 찾아가 내 작품을 봐달라고 졸라댔다. 교수님들 사이에서 내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즐겼다. 사람들이 내 작품을 봐주고, 내가 가진 생각에 대해 저들끼리 토론하는 것이 즐거웠다. 나는 내가 예술가의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서야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작년 이맘때 나는 내가 왜 ‘예술가’가 되고 싶을까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채우고 싶다거나 대단한 작품을 남기고 싶다는 진부한 목표보다는 그저 (진짜 솔직하게 말하자면) 셀럽이 되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연을 다니고, 라디오에 나오고, SNS에는 좋아요수가 넘치며, 사람들이 내가 좋아하는 책, 내가 즐겨 쓰는 제품, 내가 좋아하는 것을 관심 있게 질문해주길 원한다는 걸 깨달았다.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 겪어 보니, 한 사람의 사랑을 받기도 참 어렵던데 나는 세상 모두가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 내게 질문했다. 이것은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껴 마음을 채우기 위해 생겨난 증상인가, 아니면 그저 내가 허세와 허영이 가득한 사람인가. 나는 왜 이렇게 관심과 사랑에 갈증을 느끼는가. 나는 왜 자꾸만 그 ‘아무것도 아님’에 도달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가. 인간으로 사는 것이 참으로 ‘덫’ 같다고 생각했다.
카프카의 『성』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욕망하고 갈증을 느끼며 끝내 손에 넣지 못해 마음이 미치기도 하는, 결국 ‘자기애’를 다룬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인물 각각에게 부여된 이야기는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대부분의 독자가 ‘그래서 결국 K는 성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따진다면 나는 여기서 중요한 건 ‘K는 왜 굳이 성에 들어가야만 하는가’라고 생각했다. 상황만 보자면 K가 성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다. 토지를 측량하는 일이 그 ‘성’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을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다. 비약하자면 토지측량일이 아니더라도 K는 그 마을에 존재할 수 있으며 먹고 사는데 당장의 어려움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K는 (물론 그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겠지만) 제 3자인 내 입장에서 보기엔 ‘성’에 들어가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그가 우스웠다. 자꾸만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그게 뭐라고 특별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내겐 K가 ‘성’에 들어가려는 시도 자체가 그의 명예욕과 인정 욕구, 그리고 부질없는 인간의 허영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백작의 초빙을 받아 ‘성’에 출입할 수 있는 고귀한 신분이라고 주장하나 마을의 누구도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지금 매우 억울하다. K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상은 온통 울퉁불퉁하고 모순되며 부조리하게 비춰지는 것 같으나, 시선을 조금만 빗겨보면 오히려 세상이 바라본 K가 착각에 빠져 헛소리나 지껄여대는 미치광이 같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아마 반대의 시선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K가 보기에 세상은 매우 비효율적이고, 불필요한 절차만 가득하며, 자꾸만 속은 기분이 드는 것도 같다. 괜한 반항심과 진실을 파헤치겠다고 이리저리 발버둥을 치지만 한편, 나는 K 역시 의심스러웠다. 그가 ‘성’에 출입할 자격에 대해 그 무엇으로도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1인칭 주인공이 아닌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인 것은 아마 작가 역시 이러한 의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늘 그렇듯 한 사람만의 이야기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제멋대로 편집해 진실을 가리기 어려우니 말이다. 그러니 K의 시선에 공감할 수는 있으나 마냥 동의할 수는 없다. 오직 K 자신만이 스스로의 진실을 안다.
K의 허영심이 극에 달한다고 느꼈던 부분은 4장의 여주인과의 대화에서였는데 그는 오직 자신만이 프리다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심지어 여주인으로부터 “프리다의 처지는 당신 처지하고도 아무 상관이 없어요. (중략) 이곳에서 그녀의 지위가 불안정하다고 말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라고 못박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K는 그녀의 말을 오히려 자신과 프리다로 하여금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버린다. 그리고는 끝내 여주인으로부터 “당신은 이곳에 온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 무엇이든지 이곳 토박이들보다 더 잘 안다고 우기고 있군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 여기서도 나는 K의 자기애로 인해 본능적으로 자기방어 기제가 발동해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주인의 목소리에도 물론 그녀 자신을 향한 자기애가 있는 듯 보였다.
이 작품에서 흥미롭게 생각되었던 지점은 K에게 부여된 역할이 의무가 아님에도 오직 그만이 스스로 ‘의무감과 책임감’을 과도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 누구도 그에게 골머리를 앓아가며 ‘성’에 들어가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가 성에 들어가기 위해 만났던 사람들 역시 그에게 반드시 ‘성’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그의 인생 자체에 종말이 찾아올 것이라는 선고를 내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오직 K 자신만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음에 좌절감과 불안을 느끼고 있다. 이는 어쩌면 작가 본인의 삶, 카프카의 일생을 들여다봤을 때 그 스스로 짊어지고 있던 부질없는 의무감과 책임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니까 카프카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식은 본인의 역할과 책임을 완전하게 해내는 데 있었던 것 같다. 인간은 결국 완전할 수 없는 존재인데, 완전해지려고 자꾸만 애를 쓰게 되니까 힘겨웠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도달하니 이해가 되었다. 이 작품이 왜 카프카의 고독 3부작 중 하나인 것인지. 타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자기애는 결국 고독을 동반한다. 우리가 철학을 논하고 고민하는 것 역시 자기애의 고독을 이겨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기애란 참 덫 같은 마음이지.
나는 요즘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면서도 모르겠다고 부러 답할 때가 있는데, 모른다고 답할 때는 내가 나를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굳이 변명처럼 구구절절 말을 길게 늘어놓고 싶지 않아서다. K가 ‘성’에 들어가지 못한 것도, 마을 사람들이 ‘K’의 존재를 부정했던 것도 이 작품에는 어디에도 공개적으로 공지된 스피커의 역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였음에도 각 캐릭터 개인들은 서로가 서로를 스스로에 대한 ‘자기애’로 인해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큰 오류인 것이다.
여러분은 처음 내가 나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얼마나 나를 믿었는지 모르겠다. 결국 실패만 반복하고 있으니까. 내 이야기가, 내가 지금껏 해왔다는 노력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 있나? 필자의 유머를 빌리자면 스쳐지나가듯 만나는 사람들은 아무도 서로가 얼마나 현생을 ‘덫’ 같이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그것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다고 말해버리면 쉬워지니까. 이 또한 역시 ‘잘 살고 싶다’는 욕망에 기댄 ‘자기애’ 아닐까? 이것이 결국 카프카의 작품에 대한 나의 대답. 돌고 돌아 카프카만이 해낼 수 있는 사슴벌레식 문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