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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다스 Feb 09. 2024

우아한 인간이 된다는 것

김경은, 『빅토피아』


160cm, 64.5kg. 작년 이맘때쯤의 내 프로필을 타인에게 설명한다면 이 한 줄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최근에 보았던 어느 인스타그램에선 사람은 ‘체형’에서 성실함이 보인다는 한 줄의 문장이 있었다. 64.5kg은 성실하지 않다는 걸까. 정확히 1년이 지난 오늘 내 몸무게는 49.8kg이다. 그러나 나는 64.5kg에 있을 때보다 커리어적으로는 덜 성실하다. 매일 내 커리어와는 관계없이 3시간씩 운동을 하고, 식사라고는 점심 때 먹는 그릭요거트가 전부, 아침저녁으론 프로틴파우더를 가루째로 씹어 먹는다.


  사람들은 내 키와 몸무게를 듣는 순간 나에 대한 이미지가 생긴다. 몸무게와 외모를 가꾸는 일. 작년 한 해 동안 나는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사소한 것 한 가지를 바꾸었을 뿐인데 나를 둘러싼 세계가 바뀌어버렸다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얼마 동안은 사람들이 미웠다. 내게 다가왔던 사람들이 나의 외적인 모습만 취급하려 했다는 사실에 지치고, 질려 있는 상태다. 바로 며칠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내게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상처를 주고 싶어지고, 실제로도 진실을 기습하는 방향으로 나는 잘 모르는 상대의 정곡을 찌르고서야 정신을 차린다.


 벗겨지는 일에 대해 나는 요즘 자주 생각한다. 최근에 나는 내가 서로 다른 자아를 가지게 되는 경험을 했다. A의 앞에서는 A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맞추고, 노력했다. 좋아하지도 않는 취향을 애써 좋아하는 척했고, 별로라고 생각하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예의를 지키고 싶었다는 비겁한 변명보다는 그저 눈에 들고 싶고, 비슷한 사람인 척 보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와 생각이 다른 A에게 맞추고자 했던 마음은 생각해 보면 용인이었다. 동의하지 않으면서 포용할 수 있는 너그러움이 내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B는 처음부터 내 성질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뭐 어쩔 거야 싶었다. 조심성 없이, 과감하게. 더 단순해졌다. 그래서 편했다. 해방감을 느껴서 좋았다. 그렇지만 이것은 호기일 뿐 상대에게도 내게도 이로움은 아님을 알게되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흘러,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우아함을 유지하는 일에 대해. A와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닌 내가 되는 일은 분명 사랑이 아니다. 그건 배려일 뿐이고, 호의일 뿐이지. 그렇다면 B에 대한 마음이 사랑인가? 그것도 아니다. 어느 순간 나는 B에 대한 마음이 나의 본질을 이해받고, 동의받고 싶다는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결국 둘다 지기 싫은 마음, 인정 받고 싶은 욕구인 것이다. 역시나 사랑이란 관념은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다. A도, B도 잠깐 동안 사랑이라고 착각했지만 둘 다 잘못되었다. 그건 우아한 게 아니다. 우아해지는 건 아주 정교하고 얇지만 실은 내구성이 아주 좋아 쉽게 흠집도, 부서지지도 않는 가면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벗겨지지 않아야 우아해진다. 그렇지만 입고 있지 않아야 동시에 우아해진다. 나는 우아한 인간이 되고 싶다.


 김경은 작가의  『빅토피아』는 나체의 해방감을 누릴 자유를 우아하게 사유하는 작품이다. 구체적인 수치로 선별된 비만인들만이 가입할 수 있는 메타버스, ‘빅토피아’는 주요 인물인 희지에게 ‘차별’과 ‘혐오’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즉 지겨운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가상의 세계다. 이곳에선 희지와 공통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현실에서는 희지를 소수자로 분류했다면, 이곳에서만큼은 다수가 된다는 이야기다. 빅토피아에서는 ‘이상향’이라 불리우는 신체조건을 내세우지 않는다. 볼륨감 있는 몸매, 갈비뼈가 보일 듯 앙상한 체형으로 애써 아바타를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날씬한 체형에 대한 무지한 비난이 아니다. 절대적인 것은 아니나 다수의 시선이 만들어낸 ‘규정’과 같은 고정된 시선이 없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희지는 적어도 빅토피아에서 만나는 친구들만큼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조건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신분과, 실제 모습, 그리고 지위 등을 모두 감춘 채 익명으로 활동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익명성이 보장된, 실제 마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여는 습성이 있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다. 한 번 보고 말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나에 대한 모든 것을 털어놓은 것을 이제는 후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희지는 빅토피아에서 현실에서는 느낄 수 없는 해방감에 중독되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있는 타인들에게서 사랑받는다고 생각하고 그 역시 타인을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빅토피아에서 개최한 게임 이벤트의 우승 상품은 참으로 재밌다. 맛을 보지 않아도 미각을 느낄 수 있는 서비스를 탑재할 수 있다면 물리적인 식음 활동을 하지 않으니 저절로 다이어트가 될 것이다. 다이어트의 첫 번째 어려움이 미식을 향한 ‘자기통제력’이라면 빅토피아의 우승상품은 지극히 가상의 세계에서 자기통제력이 없어도 된다는 의미와 동시에 현실의 세계에서 자기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는 기이한 모순성을 지니게 된다. 희지는 이 게임 이벤트에 참여하며 비로소 자기 자신의 어두운 민낯을 마주하게 된다. 뚱뚱한 나를 사람들이 함부로 혐오하는 것이라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목소리를 내면서도 실은 나조차도 나를 진실로 사랑하지 않기에 내면의 마찰과 혼란이 발생한 것이다. 앞서 나체의 해방감에 중독되었다고 했었던가. 정정하겠다. 세상이 변하더라도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없다면, 나체의 해방감은 나를 찌르는 창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우아하게 뾰족하다.


  나는 요즘 ‘인간’이 되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내가 꽤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남들이 보기엔 우아한 척 건방을 떠는, 그러니까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야생마로 인식되었을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과시하지 말고, 과신하지 말라고, 그리고 함부로 괄시하지 말라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제대로 벗겨진 것 같았다. 그래서 부끄러웠다. 나는 내가 보통의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잘났다고 생각했다. 영악하고 멋지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이 겪지 않는 고난과 역경을 지나왔으니까. 이 지면에는 모두 밝힐 수 없는 극과 극을 살아보았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지닌 억울함을 모두 보상받고 싶었고, 함부로 나에 대해 규정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누리고 싶었던 나체의 해방감은 나의 본질과 낮아진 자존감을 다급하게 감추는 임시방편밖에 되지 못했다. 어리석었다.   


  그리고 다시 ‘역시나 사랑이란 관념은 없다’는 철칙에 대해 생각한다. A와 B에 대해. 나는 A에게도 불안함을 느꼈고, B에게도 불안함을 느꼈다. 내가 그 두 사람에게서 사랑을 발견하지 못했던 건 내가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사랑이란 건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어야 하는 건데, A와 B, 그리고 끝내 불안의 끝을 맺지 못해 도망쳤던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사소한 순간들에 일희일비하고, 의미 없는 장난에 휘둘리며, 일은 일대로 몰두하지 못하고, 연락을 기다리고, 버림받을까 나를 바꾸고, 애쓰고.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비효율적이잖아. 수없이 믿음이 흔들리는데, 수없이 나의 자아가 무너지는데. 그런 걸 어떻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 나는 언제나 사랑에 함부로 당하고 싶지 않아 내가 이기는 편, 주도권을 쥐는 편이 좋았던 것 같다. 확신이 있는 상태가 좋았다. 사랑을 너무 괄시했던 모양이다. 쉽게 생각하려 했다. 그런 걸 재고 따지는 게 피곤하니까. 단순하게 생각하고 싶었다. 인간의 감정이란 사소하다고 생각했다. 늘 상대방이 아닌 내 입장에서 편하게만 하려고 했던 모양이야. 무엇이 문제였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김경은 작가의  『빅토피아』를 읽으며, 나는 ‘내 몸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세상이 바뀌더라도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결국 나는 바뀌지 않는다. 중요한 건 체형이 아닌 나를 건강하게 가꾸는 힘에 있다. 즉, ‘자기애’와 ‘주체성’이 필요하다는 거다. 우리는 살면서 내가 맞춰야 하는 사람, 혹은 나에게 맞추게 되는 사람들을 만나기 마련이다.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어떤 시련에 마주하더라도 어쩌면 문제의 열쇠는 나를 둘러싼 상황이 아닌 나의 마음가짐에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엔 좋은 싫든 피할 수 없는 운명도 있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이제 나를 대가 없이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그만 미워해야겠다. 의심은 조금 거두고, 억울함은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겠다. 이제 나는 걸치고 있던 한 겹을 손끝에서 떠나보내려 한다.  



* 본 서평은 출판사 씨드북과 함께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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