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파리 (D+2)
몽롱한 기분으로 잠들어 버린 파리에서의 1일 차. 다음 날 어디를 여행할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하지 않았다. 가장 확실한 건 내가 지금 파리에 와 있다는 것. 그리고 전날 파리의 건축물과 에펠탑의 야경을 바라보았다는 것. 인터넷을 통해 아주 기본적인 내용을 알아보지도 않고 잠들어 버린 밤. 눈치로는 파리 여행은 예약이 기본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피곤함과 귀찮음이 먼저였던 모양이다. 무엇보다 여행을 하다 보니 이제 나는 나의 여행 스타일을 잘 알겠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소홀히 하는지 말이다.
모두가 잠든 새벽. 시차 적응에 실패에 꼭두새벽에 눈이 번쩍 뜨였다. 잠깐 글을 썼고, 그때부터 둘째 날의 여행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뮤지엄패스를 구매하는 일이었는데, 파리에 있는 수십 개의 관광지를 패스권 하나로 이용할 수 있었다. 마침 근처에 루브르 박물관도 있으니 패스권을 끊어 루브르를 다녀오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본격 무계획 여행. 일단 파리 시내를 좀 걷고, 박물관을 둘러보고, 샌드위치를 하나 사 먹는 거야! 나는 첫날의 나의 계획이 아주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웬걸, 파리에서의 본격 여행은 시작부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우선은 첫눈이 왔다. 비처럼 찔끔찔끔 연하게 내리던 눈은 어느새 거세져 눈발이 날릴 정도였으니까. 심지어 바람은 세차게 불고, 레깅스만 입은 나로서는 영하권에 세차게 부는 바람을 견딜 수 있는 요령이 없었다. 아침에 숙소를 나설 때 내게 레깅스 하나로는 부족할 거라며 다리토시를 입는 게 좋겠다고 권했던 룸메의 제안이 그때는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파리행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빨리 첫눈을 맞이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여름에 물들여놓은 봉숭아는 손톱이 자라고 자라 어느새 끄트머리까지 자라나 있었다. 아마도 이번에도 실패일 거야. 생각했지만 첫눈이 올 때까지 봉숭아 물이 빠지지 않고 있지 않은가. 뭐, 어디에 효과가 보일만한 건 아니지만.
버스를 타고 루브르까지 가는 길. 뮤지엄패스 수령 사무실을 찾느라 길을 잃고, 박물관을 찾아가느라 또 길을 잃었다. 심지어는 미리 시간대별 예약을 했는데 예약이 되지 않는 데다 데이터가 제대로 터지지 않아 여러 번 애를 먹었다. 9시가 되기 전에 숙소를 나왔는데, 어느덧 12시가 다 되어가고 마음은 초조해졌다. 아, 어떡해. 시간이 너무 아까워. 날은 춥고, 손은 시리고.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직원과 직원 사이를 헤매며 휴대폰만 붙잡고 있었다.
어렵사리 들어간 루브르박물관에선 신기함 그 자체였다. 역사 그 자체가 박물관 하나에 담겨 있는 듯했다. 재밌었던 점은 어릴 때 보았던 그리스로마신화 만화에 등장했던 그림들이 상당수 있어 이야기를 이해해 가며 그림을 둘러보는 일이 즐거웠다. 한편 기록과 스토리 중심의 그림이 많아 그림을 볼 때마다 머리가 조금 아프기도 했다. 화장실을 제때가지 못해 그런 것 같기도. 지하에 전시된 석고상들 사이를 헤매다 결국 복도에서 어딘가로 향하는 듯한 직원을 찾아 물었다.
"저... 화장실이 어디 있나요?"
"화장실은... 밖에 있어요. 출구가 바로 앞이에요."
뭐? 화장실이 전시실 내부에 없다고?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데? 그때 나는 가까운 화장실에 가라는 직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출구로 나가야만 화장실에 들어갈 수 있으며, 한 번 나가면 다시는 들어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여기 다시 들어올 수 있나요?"
불안의 촉은 언제나 맞아떨어졌던가. 내 말에 직원은 마주 보고 대화를 하던 다른 직원과 뭐라 뭐라 이야기를 하더니 스읍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2번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아니다. 2번이 뭐야. 더 될 거예요. 거기 가서 사정을 말하면 봐줄 거예요."
"2번이라는 거죠?"
"네. 2번은 가능할 거예요. 우리 인생의 찬스는 언제나 2번은 주어지잖아요. 아마 2번 보다 더 기회가 있을 겁니다."
직원은 내게 손가락 2개를 펴 보이며 파이팅 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메르시 보꾸."하고 외쳤다. 2번. 맞다. 인생에는 언제나 2번의 이상의 기회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서두르는 이유는 2번의 기회에 시간의 영속성은 선택 불가능한 옵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수가 빚어지고, 때로는 후회하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러나 기회는 다시 2번. 우리는 언제나 0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계속할 힘을 기르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
눈이 많이 와서 반나절은 넘게 루브르에 머물다 튈르리정원과 콩고도르 광장을 지나 저녁에 예약해 둔 투어의 집합 장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너무 추워 목도리도 사고, 장갑도 사고, 바지도 사며 필요한 살림을 조금씩 늘렸고, 투어지에선 처음으로 지하철 역사 안으로 내려가 지하철 패스인 나비고 카드를 구입했다.
센 강을 따라 걷는 길. 노트르담 성당과 셍제르망 거리를 지나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돌아가는 길. 투어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셰익스피어 서점을 방문한 일이다. 지금의 동네서점 같은 역할을 했던 셰익스피어 서점은 과거 프랑스의 신인 작가들에 투자하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대표적으로는 헤밍웨이가 있다고 하는데, 서점에서는 책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강연이나 다양한 행사도 함께하는 것 같았다. 서점의 좋은 기운을 얻고 싶어 에코백을 살까 고민하다 내려놓고는 집으로 오늘 길. 어쩐지 아른거리는 에코백의 잔상을 뒤로하며 아쉬움 가득 담아 숙소에서 커피와 바게트를 와앙 물었다.
그렇지만 뭐 어때. 인생에 한 번 더 그곳을 지나칠 기회가 오지 않겠어?
ㅁ숙소
세탁 10 유로
ㅁ티켓/투어
- 뮤지엄패스 4일권 152,617원
- 데이트립 에펠탑 야경 스냅 43,000원
ㅁ 식비
- 샌드위치&탄산수 10유로?
ㅁ 옷
- 유니클로 64.8 유로
- 이케아 담요 1.99유로
- 길거리 담요 10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