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파리(D+3)
생각해 보건대 인생은 언제나 공평하게 주어졌던 것 같다. 그러니까 행복과 불행은 언제나 공존한다는 거다. 행복과 불행은 교차하듯 찾아오지 않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채 따라오지도 않는다. 그저 함께하는 거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따르듯이.
전날 내렸던 폭설 덕분에 다음날의 날씨는 맑다 못해 빛이 나는 수준이었다. 지금껏 여행을 하며 그렇게 맑고 푸른 하늘을 본 적이 없다. 파리의 하늘을 미화한 데에는 기분도 한몫했겠지만 정말로 예상치 못할 만큼 좋은 날씨였다. 눈이 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파리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루브르 박물관이었고, 사실 그다음으로는 크게 기대하는 곳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센 강을 따라 걸으며 도서관이나 서점을 둘러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하루의 계획은 보통 출발 당일 아침에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오늘의 계획은 개선문과 오페라 가르니에, 오랑주리 미술관 정도. 세 군데나 둘러보면 많이 보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침을 챙겨 먹자마자 출발해 보았던 개선문은 파리에서 가 보았던 곳 중 가장 인상적인 관광지였고, 심지어 에펠탑보다 개선문이 더 기억에 남는다.
여행을 하다 보면, 언제나 난감하고, 구걸하게 되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이 애매해서, 시간이 촉박해서일 때가 가장 많지만, 가끔 내게는 시간이 많이 남을 때가 어려울 때가 있다. 그날도 그랬다. 당초 예상했던 일정보다 훨씬 일찍 끝난 거다. 평균적으로 저녁 여덟 시와 아홉 시 사이에 귀가하던 나에게 세 시에 모든 일정이 끝나버린다는 건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길을 헤맬 거라는 걸 모두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거다. 그러나 조급한 마음으로 서두르던 일정은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끝나 버린 거다.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지난 홍콩 여행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목표를 달성해 버리면 그다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어쩔 줄을 모른다. 차라리 아무것도 도달하지 못한 상태라면 호기롭게 계획을 세우고 무언가를 하고 있는 상태가 될 텐데, 원했던 것을 얻는 순간부터 불안의 늪에 빠지기 시작하는 거다. 그러니까 나의 불안은 하루를 조금 더 성실하게 채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
홍콩을 여행하는 동안 몇 번이고 길을 왔다 갔다 했던 기억이 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갈 곳이 있었는데 전날 목표했던 곳을 모두 다 가버린 거다. 다음날 계획을 세우려는데 마카오행을 결정했다 번복하기를 반복. 근교 마을에 놀러 가려다 너무 시골인 탓에 포기하고(언어가 제법 통했던 일본과는 다른 결의 두려움이 있었다), 또 다른 곳을 찾아보려니 검색되는 곳은 없고, 날은 덥고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고, 호텔로 돌아가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결국 지하철역에서 이리저리 타고 내리 고를 반복하다 내린 결정은 전날 가보았던 곳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을 다시 방문해 보는 거였다. 그게 침사추이의 바닷길을 따라 걷는 거였고, 나는 그날 그곳에서 미하일 엔데의 <모모>와 서머싯 몸의 <면도날>을 읽었다. 여행지에서 관광지를 구경하지도 않고, 그저 익숙해진 풍경을 보며 책을 읽는 것뿐이었는데 그날 나는 어쩐지 개운한 마음으로 침사추이를 떠났던 것 같다.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도착한 숙소에선 우연히 발견한 한 유투버의 여행 코스를 보고 다음날 따라해 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날 밤에 제출해야 하는 원고를 쓰며 하루 동안 내게 있었던 일들을 복기해 보았다.
우리가 여행을 하는 이유는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것도 있지만 현실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성취감을 맛보기 위해서인 것도 있을 거다. 내가 온통 모르는 길을 따라 걷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나의 세계를 통제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여행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로직이라는 생각도 든다. 길을 잃을 때마다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언제나 곁에 있고, '나'는 내가 믿는 것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니까. 문제는, 목표에 도달한 뒤의 불안과 공허를 어떻게 다스리는 것이 좋을지 아직 나는 헤매고 있다는 거다.
한참을 갈등하며 길의 끝과 끝을 오가던 나는 지도를 펼쳤다. 뭘 할까. 뭘 먹을까. 아니면 볼까. 뭐라도 살까?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던 룸메들의 한 마디. 쇼핑을 목적으로 파리에 방문했다던 한 룸메는 전날 메르시에 다녀왔다며 하하호호 이야기를 했다. 메르시.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에코백 하면 떠오르는 브랜드가 아니던가. 게다가 가는 길에 빅토르 위고 생가와 바스티유 광장도 갈 수 있다. 시간이 남는다면 다음날 가기로 결정했던 팡테옹에 가보는 것도 좋겠지. 다시 목표물이 생긴 나는 금세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마무리된 일 위에 새로운 흥미로운 일을 찾아 떠나는 거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휴식하는 것이 재충전의 시간이라면 나는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또다시 길을 잃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한(?) 여행을 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괜찮다. 세계를 조금 더 멀리서 넓게 보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젠 길을 잃거나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한 자리에 주저앉아 혼란스러워하기보다는 지도를 펼치고는 가장 가까운 볼거리를 찾아다닌다. 그러다가도 정말로 할 게 없으면 잠시 쉬고는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는 여유도 생겼다.
그렇게 가게 된 메르시에서 마음에 쏙 드는 모자를 발견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덕분에 예정에도 없던 빅토르 위고 저택과 보쥬광장, 바스티유 광장도 가볼 수 있었다. 그날 나는 보쥬광장에서 아무것도 없었지만 풀밭을 놀이터 삼아 뛰놀던 아이들의 평화로움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실은 진짜 여행이란 건, 그런 것들을 여유롭게 수용하는 자세를 기르는 일 아닐까, 어쩌면 어른으로서의 진짜 내 인생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