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파리(D+4)
"파리에 가면 뭘 봐야 해요?"
내 질문에 다들 고개를 갸웃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전날 다들 파리 중심가에서 볼만한 것들은 모두 본 후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서로 동선이 겹치다가 멀어지기도 했는데 그렇더라고 하더라도 언제든 연락하면 걸어서 마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언니, 베르사유 궁전 가봤어요?"
"맞다. 베르사유가 있었다!"
아침을 먹다 말고 구글맵을 켜 베르사유 궁전이 있는 곳을 찾아본다. 거리상으로는 멀어 보였지만 C노선을 타고 가면 1시간 남짓한 거리. 여러 번의 여행 끝에 열차 이동이라면 40분 정도면 충분하다는 얘기다. 오늘은 여기다. 나는 베르사유 궁전과 판테옹, 그리고 아침의 에펠탑을 보는 것을 오늘의 목표로 정한다. 다음날이면 유로스타를 타러 아침 일찍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실상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이나 다름없었다. 날씨를 보니 전날보다는 덜 추운 듯했다.
"그럼, 나 다녀올게요!"
7개의 침대 중 가장 먼저 주변을 정리하고 집을 나서는데, 문득 파리에서의 마지막이 다가온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동시에 다음날 있을 런던행 열차를 잘 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여행. 길을 잃어도, 내가 길을 잃었는지조차 발견될 수 없는 여행. 그제야 내가 유럽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커다랗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에펠탑. 숙소에서 에펠탑이 보이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에펠탑 구경은 뒷전이었는데, 둘째 날 이동하며 지나쳤던 아침의 에펠탑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개선문이 중후함의 위용을 나타내는 구조물이라면 에펠탑은 청춘의 대명사 같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설레던 에펠탑.
그러나 설렘과는 반대로 바람은 거세게 불어왔다. 덕분에 몇 번이고 손가락을 오들오들 떨며 오전에 마쳐야 하는 업무를 급하게 마무리해야만 했다. 그러고 난 뒤 고개를 들어 에펠탑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볼 때는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에펠탑의 중심 아래 서 있으니 거대한 생물이 내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다.
에펠탑 구경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출발한 베르사유 궁전. 표를 찍고 들어가는데 평소와 달리 보라색의 2층 기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사람들로 붐비는 일반 열차와는 조금 다른 형태. 어딘지 모르게 멀리 여행을 가야만 할 것 같은 모양새였다. 기차 안은 평일이라 그런지 한산했고, 대부분 관광객으로 보였다. 나는 백인의 노부부가 타고 있는 자리의 맞은편에 앉아 또다시 일을 시작했다. 마감이 분명히 정해져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짬이 날 때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다소 센 바람 때문에 꽁꽁 언 손을 툭툭 털며 일을 하는데 잠깐 사이에 베르사유 궁전이 있는 역에 도착해 버렸다. 궁전은 입구부터 달랐던 것 같다. 여행자의 이미지가 잔뜩 배어 있는 사람들을 따라 5분 남짓한 거리를 걷다 보면 루이 14세의 동상과 멀리 궁전의 철창이 보이기 시작한다. 뮤지엄패스가 있었기 때문에 입장료는 무료. 파리에서의 마지막 일정이었기 때문에 첫날의 루브르처럼 시간을 오래 보내지 않고 가이드맵부터 찾았다.
왕비의 방부터 거울의 방까지 둘러보고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베르사유의 정원. 인터넷을 통해 기대했던 풍경은 하절기를 담고 있었지만 동절기라도 정원의 풍경을 한눈에 바라보고 싶었다. 트리아농까진 계획에 없었고, 정원까지만 둘러보고 낮의 판테옹을 보러 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여유가 된다면 파리 도서관이라는 리슐리에를 볼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웬걸. 궁전에서 나와 구글맵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한참을 걸었는데도 정원이 나오지 않는 거다. 분명 지도가 가리키는 대로 성실하게 따라갔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키가 큰 나무가 빼곡히 들어차 있어 내가 어디쯤 왔는지, 이곳이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사람들과 말을 안 하고 싶어지는 시점에 나는 나무 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사람들에게 질문을 해야 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느냐고, 그리고 목적지는 도대체 얼마나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냐고.
사람들의 대답은 모두 달랐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정원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자신도 모르겠다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던 사람도 있었으며 혹시 목적지를 변경해 보지 않겠느냐고 질문하던 사람도 있었다. 나는 무조건 가든을 보러 가겠다며 '가든'의 위치만을 반복해서 불렀다. 그때 들려온 낯선 목소리.
"지금 네가 서 있는 여기가 가든인데. 너 완전 모르는구나."
몇 번을 물었을까. 힙해 보이는 음악을 틀며 몸을 흔들거리던 무리 중 한 명이 정원의 위치를 묻고 있는 내게 다가와 말했다. 그리고는 정원 내부를 열심히 달리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겨울에도 러닝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분명 정원은 입장료를 따로 받는다고 했는데... 정원으로 가는 티켓오피스를 내내 찾아다녔으나 어디에도 티켓오피스가 없었던 거다.
생각해 보니 처음 정원의 전경을 보았을 땐 이곳이 정원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내가 계속해서 정원의 입구를 찾아다녔던 건 매표소가 없기 때문이었다. 10유로 정도 하는 금액이면 꽤 큰데, 아무리 볼 게 없는 동절기라도 티켓값을 받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이미 길을 잃고 잃다 트리아농까지 다녀온 후였으므로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미로 같은 정원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궁전에서 정원으로 향하는 계단참에 앉아 턱을 괸 채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처럼 지도를 보며 길을 헤매는 중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술래잡기를 하듯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중앙길을 제외하고 양갈래로 퍼져 있는 미로 같은 숲은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고요한 데다 큰 나무가 바람을 막아줄 정도로 빼곡히 들어차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영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한편으로 어른이 되어 가는 법을 헤매는 일은 미로 안에서 미로를 찾는 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미 30대에 다다라 있고, 누군가에게는 한참 어른일텐데, 나는 여전히 '어른들의 삶'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세상에 '~한 어른들'이라는 표현을 쓰며 그들과 나 사이의 벽을 세우는 것이다. 나는 내가 아직 미성숙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른이 아닌 것은 아닌데, 내가 자꾸 나를 어른이라 칭하지 않음으로써 진짜 어른이 되어 있는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최근까지도 나는 나의 미성숙함을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으니까.
정원 찾기는 그렇게 끝을 맺고 나는 다음 목표인 판테옹을 둘러보고 그날 하루는 생제르망 거리를 걸으며 쇼핑할 것들을 둘러보고, 지도는 잠시 내려놓은 채 센 강을 따라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 내가 경험한 파리는 아름답고, 경이로웠지만 그랬기에 쉽게 허무해지고 마음이 공허해지는 인상을 주는 도시였던 것 같다.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 내가 파리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인상은 여유로움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거리와 도시의 기품을 유지하기 위해 너무 많은 것들을 감추고 살아가는 곳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감추는 것들은 결국 들통이 날 것이다. 약에 취해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거리 밖으로 뛰쳐나온 사람들이 때로는 파리의 귀퉁이를 채워 넣어 놓듯 말이다.
아름다운 도시, 그러나 허무의 도시. 그것이 내가 파리로부터 받은 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