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

- 김화진, <개구리가 되고 싶어>

by 곽민주

겨울이 되면, 왜인지 자꾸만 잠을 자고 싶어진다. 옷을 몇 겹이고 껴입고도 두꺼운 이불을 덮고 눈을 감고만 싶어지는 것이다. 오래 잠들어 있지는 못해도 때마다 간식을 챙겨 먹는 것처럼 졸기도 하고, 엎드려 있기도 하며 가장 춥고 외로운 시간을 견딜 때가 있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처럼. 한겨울이 오면 모든 것이 권태로워지는 기분도 뒤따른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할 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익숙함에 너무 오래 빠져 있다 보면 내게 주어진 시기가 마지막 계절에 다다른 것은 아닐까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내 기분은 겨울과 같은 계절에 머물러 있었다. 뭘 해도 기대가 되지 않는 상태. 좋지도 나쁘지도, 쉽사리 넘어지지도 않을 정도로 단단한 마음. 내가 그런 사람이었으므로 인생 자체에 호기심이 일지 않았다. 긴 여행을 다녀온 이후에도 여전했다. 피로감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나는 그것을 내 또래의 친구들보다 빨리 깨달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남들보다 더 예민하고, 불편함을 쉽게 느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나만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아무래도 남들은 다 아는 걸 나만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에게는 얼마간 그렇다. ... 그곳은 남들도 알고 나도 좀 아는 곳이었다. 실은 나만 아는 곳 같은 건 없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그런 곳이 좋았다. 나도 조금, 너도 조금 아는 곳. 이때 안다는 것은 실제 정보의 양이 아니라 그런 느낌일 뿐이다. 이 동네는 어쩐지 내가 알 것 같아, 하는 느낌. ... 뭔가를 떠올리면 뒤따라 오는 것. 그 둘을 뒤집으면 결과가 같지 않다는 것이 재밌다. 언제나 그렇게 딱 떨어지지 않는 것이 사람의 머릿속이고 생각이란 것이다.'(6p)


'그것만으로 뿌듯하고 기쁘던 시절이 있었는데, 아마 4년 차 때부터 하지 않게 된 것 같다. 그게 어쩌면 나에게 회사가, 회사에서의 나 자신이 익숙해졌다는 방증 같은 것이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의 권태는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좋은 점은 이제 더 이상 회사에서 이유 없이 긴장하거나 오들오들 떨지 않는다는 것, 나쁜 점은 무엇에도 설레거나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 (8p)



<개구리가 되고 싶어>에서 주인공 '나'는 스스로 아껴왔던 '일'에 권태감을 느끼고 있다. 어떻게든 일과의 관계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회복은커녕 권태감은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으로 비틀리기 시작한다. 그러던 차에 '수경'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수경은 그 존재만으로도 나의 권태를 깨는 사람. 봄이 시작되는 경칩에 정말로 봄처럼 나타난 존재다. 나는 경칩에 떠난 강릉에서 수경을 기다리고, 재주가 많은 수경은 '나'의 타로점을 봐주기까지 한다. 수경과의 대화를 통해 '나'가 느끼는 권태를 끝내려면 이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거나 새로운 어떤 것이 나타나기를 기대하기보단 스스로 지금의 정지된 풍경을 깨고 나와 봄처럼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사실은.... 이것 말고 뭐가 더 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이게 단가? 이게 다야? 그런 마음이 권태를 만드는 것 같은데.

그런가. 나는 사실 삶에 뭔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런 거였나. 수경의 말을 듣자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p.15)



인생에 대한 권태를 느끼고 있던 시기에 내가 크게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성장욕구에 대한 것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내가 성장욕구랄까 인정욕구 같은 것이 매우 큰 사람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잘하고 싶은 마음. 그다음을 상상하는 기대감 같은 것이 나의 생을 완전히 구성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 나답지 않은 결정을 내리거나 생각을 할 때면 나는 나의 생각들이 퍽 대견스럽고 멋있기도 했다. 내가 나아갈 수 있는 그다음은 어디일까, 그 다음엔 어떤 재밌는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개구리가 되고 싶어>를 읽으며 '권태'에 대한 그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권태는 기대감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게 전부인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권태를 만든다. 일상은 반복되고, 반복된 패턴이 하나의 생을 만들어가는데 그걸 통제하려 하는 욕구가 갈등을 만들어낸다. 소설 쓰기의 작법 중 '갈등'은 욕구가 만들어낸다고 몇 번이고 배웠으면서. 정작 내 삶의 갈등에 대해서는 오래도록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어딘지 모르게 공허한 마음이 들 때마다 이 소설을 촘촘하게 자주 꺼내 읽었다.


여행을 다녀온 이후에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일을 하고, 내게는 계속해서 새로이 풀어야 하는 과제들이 생겨났는데 이상하게 긴장이 되지 않았고, 두렵지가 않았다. 예측되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공격적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바라보고 대비하는 습관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가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이것을 '권태'라고 불렀다. 내게 권태가 찾아온 거라고. 어쩌면 그 권태는 몇 년 전부터 이미 시작되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이건 해결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이치인 것인 것 같다고.


몇 년 전, 선배들과의 자리에서 더 이상 나 자신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10년 전쯤 교수님께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 교수님은 너무 일찍.. 안타깝다는 말을 하며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했고, 나는 그때부터 내 안에서 무언가 조금씩 죽어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생각보다 나 자신을 잘 안다는 건 무서운 일일지도 모른다고. 다행스럽게도 그런 이야기를 한 지 얼마되지 않아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빠르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 시간들을 보내는 동안 즐겁다, 설렌다 등등의 감정을 느끼기보단 그저 무엇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가버렸다는 인상만 남아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10년 전의 그 상태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보단 가지고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작게는 내 이름이 세상 어딘가에 떠돌고 있다는 것. 크게는 내 방의 가구와 소품 같은 물성부터 관념적인 가치들까지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오로지 내가 책임지고 결정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나를 더 주체적으로 돌보기 시작할수록 언젠가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이 선명해지고 있다. 정말 이게 다야? 그다음이 없어?


제법 심각에게 말하는 내게 선배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내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떤 면에서 나는 내 인생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 제법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모르는 영역이 사랑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좀 다른 관계를 발명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할 때, 그때 나는 기세가 좋고 무척 즐거웠는데. 완과는 그런 걸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어쩌면 조금은 했다고 믿는다. 그럴 만한 의지가 충분했으니까. 의기투합. 그런 상태였으니까. 그때 문득 생각이 났다. 개구리.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상대를 볼 때 그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상대를 나의 거울로 봤다. 마법의 거울처럼 거기에 내가 원하는 게 보였다.

나는 수경을 볼 때마다 무척 개구리 같다고 생각했다. 아주 작은데 앉은 자리에서 마음먹으면 펄쩍펄쩍 높이 뛰는, 어디로 튈지 모르고 그저 점프력이 엄청난, 점프에의 의지가 엄청난 개구리 같다고 생각하고 부러워했는데, 실은 그게 내가 되고 싶은 거였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수경에게서도 나를 본 것이다. 완에게도 그랬을까. (p.22)


수경에게 그렇게 말하자, 입 밖으로 내뱉고 나자 머릿속에서 엉켜 있던 문장이 시원하게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어 보았다. 개구리 되고 싶어. 개구리처럼 되고 싶어. 몇 시간이고 같은 자세로 앉아 있을 수도 있지만 마음먹으면 단번에 예상할 수 없는 높이와 거리를 뛰어오르기도 하는. 그런 잠재력이 내 안에 있다고 믿고 싶어. 누가 나를 우물 밖으로 꺼내주기를 기다리고 싶기도 하고. 아무튼 개구리. (p.23)


사랑은 분명 새로운 사회생활이었다. 정신없이 나를 바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음에도 온종일 생각과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었다. 그러는 사이 계절이 다시 빠르게 흘렀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오래도록 쌓아온 루틴 속에 사랑이 있었고, 그 루틴은 지겹도록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루틴에 변수가 생기는 것보다 그 모든 균형이 잘 맞아떨어질 때 편안함을 느꼈다. 편안함은 금세 권태가 되었다. 권태는 다시 기대감을 만들어내었고, 알지 못하는 세계의 면면들이 권태를 부수고 스스로 아는 내 모습이 팽팽하게 또다시 권태의 벽을 만들어냈다.


주인공 '나'에게 '수경'은 생명력 있는 사랑의 표현이다. 가끔 으스스하고 연기가 되어 버리는 수경은 사랑의 허무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에게서 파생된 도무지 나는 이해할 수 없고 이질감이 들지만 곁에 있기를 바라는 이기심이 생겨나게 만드는 그런 존재. 수경은 회사생활에 얽매여 있는 '나'와 다르게 여행유튜버로 자유롭다. 적성에 맞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사고방식조차 나와 조금은 다른 듯하다. '나'는 퇴사를 꿈꾸면서도 뛰지 못하는 개구리 인형을 사무실에 두고 온다.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펄쩍하고 파티션을 넘을 것 같은 그런 개구리는 생명력이 없어 뛰고자 하는 기대감만 가진 채로 정지되어 있다.


개구리가 우물 안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잘 인지하는 존재라면, 반면에 예기치 않은 일로 인해 개인의 속성을 잃은 채 언제고 새로운 세계를 마주할 잠재력이 있는 존재로도 해석된다. '수경'이 불을 피워야만 나타날 수 있는 연기라면, '나'는 수경과 같은 기대감을 만나 더 크게 뛰어오를 수 있는 개구리다. 소설을 읽으면서 퍽 공감이 되었던 지점은 가장 퇴사를 꿈꾸었던 '나'는 팀장으로 승진이 되고, 동일한 권태를 느끼면서도 퇴사를 생각하지 않던 동료 '완'이 정작 퇴사를 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소설을 읽는 동안 개구리의 포지션에 있는 인물은 누구일까 생각했다. 우물을 벗어난다는 건 권태를 회복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지금의 세계를 완전히 탈출한다는 의미일까? '완'과 '나'는 모두 우물 밖으로 뛰어 오른 개구리인 것일까? 김화진의 소설의 결말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한 수가 있다. 해결이 되려나, 명확히 답이 떨어지려나 기대하며 읽어가다 보면 예기치 못한 반전이 긴장을 부수고, 안타까움이든 설렘이든 무엇이든 등장을 하는데 그것이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고,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개구리가 '수경'이든, '완'이든, 주인공 '나'가 되든 그런 존재가 되는 일은 결국 스스로 움직여야 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누가 초점화자인지 누가 잘 되고, 누가 어떻게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잠재력을 가지고 있든 가지고 있지 않든, 환경이 무엇이든 시간을 되돌리든 되돌릴 수 없든. 그런 모든 것들은 내가 통제할 수 없고 조절할 수 없으며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개구리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마음만 먹으면 뛰어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시점을 정하는 것도, 마음을 먹는 것도 모두 '나'의 몫이다. 그리고 그 마음을 먹는 동기가 생기는 것. 곁을 지켜주는 동기가 있든,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동기가 되든.


겨울은 금세 지나갈 것이다. 이제 곧 경칩이 올 것이다.






#001 2026.01.02 김화진 <개구리가 되고 싶어>, 위즈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