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 신념, 신념

이민진, <파친코>

by 곽민주

“그날 저녁, 노아에게 전화가 오지 않자 선자는 노아에게 요코하마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음 날 아침, 한수에게 전화가 왔다. 선자가 사무실에서 나가고 몇 분 후, 노아가 총으로 자살했다.” (p.205, <파친코2>)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바보처럼 보낸다. 친근한 사람들에게 어리광을 피우고, 맛있는 음식 앞에 방긋 웃을 줄 아는 사람. 단순한 패턴을 반복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는 날이면 언제고 기억에 꼭 남는 사건이 생겨 버리는데, 그때가 되면 원인을 알 수 없어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대체로 무언가를 놓쳤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것이 놓친 것이 아닐 때가 많다. 애초부터 해결될 수 없는 것. 굵직한 갈등과 사건은 대체로 신념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파친코>를 읽으면서 숨이 멎을 만큼 힘들었던 장면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노아’라는 인물이 자신을 부정하고, 회피하며 도망가려 했던 자신의 정체성(조선인인데다 야쿠자의 혼외자라는 사실)을 마주하자마자 스스로 머리에 총구를 겨누었다는 사실. 그리고 뿌리였던 ‘선자’가 그 충격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저 문장 앞에서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몇 분간 같은 문장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고, 그다음에는 앞장을, 더 앞장을 넘겨 사건을 되짚어보았다. 그다음에는 담담한 마음으로 책에서 눈을 떼고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내가 그 소설을 다시 쓴다고 하더라도 나 역시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도저히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신념을 가진다는 건 정말로 무서운 일이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신념은 곧 운명이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 우리는 누구도 무엇도 할 수 없다.

겨울에 다가가 자주 ‘신념’에 대해 생각하곤 하던 차에 이 책을 재독 하게 되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알 수 있는 경험. 바보처럼 구는 외피 속에 때로 부끄러워지는 신념들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 신념은 변하기도 하고, 더 올곧아지기도 했다. 신념이라는 단어는 언뜻 보면 무거워 보이지만 실은 큰 것들이 아니다. 요리를 할 때 어떤 브랜드나 원산지를 고집하는 것도 신념일 수 있고, 생활패턴이 정해져 있는 것도 신념일 수 있으며, 타고난 말투나 행동도 신념이 될 수 있다. 나와 다른 상대의 차이를 인정하기보단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신념일 수 있다. 그러니까 신념은 자신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그 자체다. 신념은 가치관의 차이, 혹은 태도의 문제, 또는 자기애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진 신념들이 부끄러웠다. 그동안의 나는 내가 신념이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는데, 이제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 대해 의심하지 않으며 살아가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우스꽝스럽고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백이삭의 계획을 말하자 선자는 그 사람의 아내가 될 마음의 준비를 했다. 백이삭이 자신과 혼인하면 어머니와 하숙집, 자신과 아이가 고통스러운 낙인을 피하게 될 터였다. 좋은 집안의 훌륭한 사람의 성을 아이에게 물려주게 될 터였다. 선자는 백이삭이 그렇게 하려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설명해 주려고 애썼으나 어머니나 선자나 백이삭을 돌봐준 것이 그렇게 별다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른 하숙인이 아팠더라도 똑같이 했을 터였다. 게다가 백이삭은 하숙비도 제때에 꼬박꼬박 냈다. ”보통 사내라면 다른 사람의 아이를 키우려고 하지 않을 기다. 천사나 바보가 아니고는 못하는 일이데이.“ 어머니가 말했다. (p.116, <파친코1>)

우리는 이 대목에서 이 작품이 지닌 신념과 각 인물들이 가진 욕망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소설 속 주요 인물인 ‘선자’는 조선에서 과부인 어머니와 숙박업을 하고 있다. 그러다 무역상인 한수를 만나 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선자의 신념은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그와 ‘정상성’에 속하는 가정생활을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수의 신념에는 다수가 말하는 ‘정상성’이라는 형태가 없었다. 그가 사는 세계는 사업적이었고, 다수의 시각이나 관례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한수는 죽을 때까지도 선자를 사랑하고 그리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선자에게 주었던 상처에 대해서는 전혀 죄책감을 느낀다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그건 아들인 노아에게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한수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수의 아이를 임신한 선자와 사연도 제대로 묻지 않고 결혼한 이삭의 신념은 어떠한가. 그는 선자의 가족이 운영하는 숙박에서 기적적으로 폐병을 낫고 선자와의 결혼을 결심한다. 이삭은 선자를 돌보기 위해 자신이 태어났다고 믿는 존재다. 자신의 쓸모를 다하고 싶어하고, 그 운명이 종교적인 뜻과 연결된다. 이것이 이삭의 신념이고 그의 신념이 새로운 운명을 만들었다. 선자는 선택한다. 이삭과 결혼하는 것을. 선자의 신념은 가족을 보호하는 것에 있다. 선자는 이삭과 결혼함으로써 조선을 떠나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지 않을 수 있으며, 진정으로 사랑했던 한수를 떠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아이도 지킬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선자의 신념은 당시 많은 여성에게 주어진 것과 같을 뿐이다.

이 신념을 이어받아 노아가 태어났다. 노아는 선자와 한수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선자와 이삭의 아들이기도 하다. 노아가 자살을 택한 것은 자신이 야쿠자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이다. 노아의 신념은 한 번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때로 우리는 그것을 자존심이라고도 부를 것이다. 20대의 노아가 자신을 부정했을 때에는 조금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었다. 그때의 신념은 어리고, 어린 신념은 때로 휘어지기보단 부러지는 것을 택할 때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40대가 된 노아가 가진 신념은 많이 안타까웠다. 동시에 신사 참배를 거부해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어버린 이삭이 생각났다. 내가 만약 이삭이라면, 이 소설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글로 행동을 만드는 것은 쉽고, 실제로 행하는 것은 어려우며, 어떤 것들은 참으로 무섭다고 생각하게 된다.

”진실은 자애로운 지도자 따위는 없다는 거야. 네가 날 위해서 일하니까 난 널 보호하지. 네가 바보처럼 굴면서 나한테 득이 되지 않을 짓을 하면, 난 널 보호하지 않아. 그런 조선인 단체들 이야기를 하자면, 거기 지도자들도 그저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해. 돼지와 다를 바 없이 멍청한 인간들이야. 그리고 우리는 돼지를 먹지. 넌 전시에 굶주리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터무니없는 값을 받고 고구마를 파는 농장주 다마구치와 살았잖아. 그 사람은 전시 규정을 어겼고 난 그 사람을 도왔어. 그 사람은 돈을 벌고 싶어 했고 나도 마찬가지니까. 그 사람은 자기가 예의 바르고 착실한 일본인이라거나 자랑스러운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하겠지. 다 그렇지 않아? 그 사람은 형편없는 일본인이지만 난 영리한 사업가야. 난 좋은 조선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니야. 난 돈을 아주 잘 벌어. 모두가 사무라이 어쩌고 하는 헛소리나 믿는다면 이 나라는 결딴날 거야. 천황도 다른 사람 따위에나 신경 쓸 것 같아?“ (p.321, <파친코1>)

한수가 자신이 아끼는 동료를 붙잡듯 건네는 말이다. 한수의 사업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도 정치적인 상황에서의 신념을 가지려 하지 않는, 자신의 민족성에도 신념을 가지려 하지 않는 한수가 어떻게 지속 가능한 관계들을 만들어갈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한수는 신념을 가지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확인시키거나 뜻을 맞추기보단 상황에 맞게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은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선자다. 선자를 위해 자신이 변하지 않은 것. 그것 외에는 모든 면에서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동시에 생각했다. 선자와 한수를, 선자와 노아를, 그리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관계들을. 모두 언급할 수 없을 만큼 두 권의 책엔 많은 신념들이 있었다.

최근에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곤 했다. 그것은 나에게 꽤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지속 가능한 관계에는 앞을 멀리 내다보는 큰 수가 필요했는데 내가 살아온 세계와 나와 다른 사람들이 살아온 세계가 너무 달라서 때로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것은 종종 걱정거리가 되기도 했고, 불안정한 마음을 갖게 만들기도 했다.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내가 가진 몇몇 신념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대체로 우스꽝스러운 자존심일 때가 많았고, 자존심을 부릴 때면 내가 생각하지 않은 방향으로 오해를 사거나 별로인 사람이 될 때가 많았다. 상대방의 신념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다. 신념이란 건 대체로 유연할 수 없는 거구나, 싶은 마음에 웃음이 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신념을 한 번에 바꾸거나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순 없는 걸.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을 사실이다. 중요한 건 끊임없이 ‘나’를 의심하고, 나의 신념이 항상 옳다고만 생각하지 않을 자세. 나와 다른 신념을 존중할 줄 아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거기까지 갔을 땐 그런 마음이란 건 결국 사랑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존중하는 자세란 어떻게 보여주고, 노력해야 하는 걸까. 아마 그것이 내가 다음에 곰곰이 생각해 가며 읽고 싶어질 텍스트의 주제가 될 것이다.

<파친코>는 그야말로 운명에 대한 것이고, 자신이 운명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는 신념을 가진 지극히 인간적인 공간이다. 승률을 조작하고, 사람을 배신하고, 그렇지만 가장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기적 같은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는. 내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 경험을 하는 곳이 바로 ‘파친코’이고, 파친코 같은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아닐까. 대부분의 시간을 바보처럼 보내면서도 모처럼 졸린 눈을 비비며 이런 생각들을 하는 오늘이 나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사건이 되어주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소설을 읽으며 기억에 남았던 한 문장을 건네 본다.

그 사람에 대해 잘 알게 될 때까지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말라고 당부했다.(p.146, <파친코1>)





#002 2026.01.15 이민진 <파친코 1, 2>, 인플루엔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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