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라고 부르는 것

도리스 레싱, <다섯째아이>

by 곽민주



해리엇은 전혀 불안하지 않았으며 항상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 전문직 여성이 될 것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 토론할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그 문제에 대해 결코 핏대를 올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괴팍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적당하게 원하는 만큼은 모두 가질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었고 딸들에게도 그렇게 보였다. 해리엇의 부모는 가정생활이 행복한 인생의 기본이라는 점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 그러기에 그녀는 인생의 모든 굴곡이나 진창을 처음에는 잘 모르면서 그러나 점차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그곳으로 나아갔다. (p.9)


데이비드의 배경은 상당히 달랐다. 그의 부모는 그가 일곱 살 때 이혼했다. (...) 그래서 모두들 그의 정신적인 문제에 대해 신중하게 대하는 그런 아이 중 하나였다. 어린애 입장에서 볼 때 매우 불편하게 또는 불행하게 느꼈을지라도 고약하거나 원한에 사무친 일은 없었다. (...) 그는 미래에 대한 격렬하고 개인적인 요구를 가지고 성장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떠한 여성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았다. 데이비드에게 미래는 그가 목표로 삼고 보호해야 하는 어떤 것이었다. (p.10)


나는 대부분 다섯 시에서 여섯 시 사이에 눈을 뜬다. 새벽 시간이다.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그렇다. 얼마 동안은 그런 내가 몹시도 싫었다. 가족들 모두가 잠이 든 시간에 홀로 일어나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커피나 코코아를 마시며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싫었다. 그것은 별로다의 감상을 넘어선 분명한 판단이었다. 지루하다, 지겹다, 싫다. 싫은 감정이 든다. 나는 시간이 흐르는데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바보 같아지는 순간이 싫었다. 이런 기분은 아침이 아닌 시간에도 자주 느끼는 것이었다.


내가 나 스스로 독립적이지 못하다고, 아이 같다고 여겨지는 그런 생각이 들 때도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구체적이지 못하고, 모호하기만 하고, 쓸데없이 낭만적이기만 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대체로 그런 순간마다 운동을 했다. 달리기를 하거나, 체육관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점심을 포장하겠다며 한두 시간 거리를 걸어 다녀오기도 했다. 자라오며 나는 내가 매우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차곡차곡 쌓은 나의 시간은 꽤 의미있었고, 누군가에게든 나는 내가 꽤 어른스럽게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른답게 산다는 건 어떤 걸까. 최근에 나는 자주 질문하게 되었다. 일을 하고, 자산을 가지고 있으면 어른인가? 가족의 보호자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어른인가? 나를 책임질 수 있다면 어른이라고 볼 수 있는가? 어린이의 반대가 어른일텐가?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나는 어른이 맞는데, 내 스스로 어른다운 사고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맞는가 고민하게 된다. 요즘 들어 오래전 방영된 드라마를 볼 때면 이불킥을 하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상당한데 대체로 공감이 가는 장면들이 많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지금 내 또래 나이의 캐릭터이고, 이들 역시 모두가 어른이라고 부르지만 그들 세상 속의 이야기는 유치하고 어리석다. 대체로 한쪽이 자존심을 부리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가장 좋은 선택을 한다고 한 주인공의 선택은 실질적으로 사유의 궁핍만 있을 뿐이다. 드라마 속 이야기의 결말은 대체로 해피엔딩이 뻔하고, 나는 가끔 그 작품의 이후를 생각하곤 하는데 가족과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나의 사고 역시 늘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해피엔딩은 한 번인 걸까? 아마도 우리는 그들 인생의 한 막을 봤을 뿐이지 그들의 이야기는 새드엔딩도, 해피엔딩도 여러번 통과될 것이다.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내 생각엔 너희들이 만사에 너무 서둘러서는 안 될 것 같아. 잠깐, 내 말을 끝까지 들어. 해리엇은 이제 스물넷이야. 아직 스물다섯도 채 안 되었어. 데이비드, 너는 겨우 서른이야. 너희 둘은 마치 모든 것을 움켜잡지 않으면 그것을 놓쳐 버릴 거라고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구나.”(p.38)


직장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첫 만남에 서로의 운명을 가늠한다. 데이비드는 해리엇이야말로 자신이 찾고 있던 바로 그 여자라고 생각하고, 해리엇 역시 데이비드라면 스스로도 구식이라고 생각하는 결혼이나 가정생활의 열쇠를 그가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생각이 가장 일치했던 것은 런던에서 큰 집을 마련하고 그 집에서 적어도 아이를 여섯에서 여덟 정도는 양육하고 싶다는 소망이다. 겨우 이십 대 중반과 후반을 갓 넘긴 시절에 말이다. 주변에서는 이 커플의 결혼을 응원하면서도 동시에 우려 섞인 기대를 하게 된다. 해리엇은 데이비드와 결혼하자마자 첫째 아이를 가지게 되고, 데이비드는 자신의 야망 섞인 계획에 맞춰 큰 집을 마련한다.


첫째가 태어났을 때 이 어린 부부에게 사람들은 축복과 새생명에 대한 반가움, 그리고 찬사를 보낸다. 얼마되지 않아 해리엇은 둘째를 임신한다. 그의 부모, 친구들, 그리고 직장동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 집의 침실에 대한 장난 섞인 유머를 내뱉기도 한다. 그리고 셋째와 넷째가 연이어 태어난다. 해리엇은 자신이 임신했을 때 받았던 사람들의 인정과 부러움 섞인 눈빛을 잊지 못하고, 데이비드는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결핍을 해리엇을 통해 해소하고자 한다. 인정욕구와 결핍이 만났으나 그들이 서 있는 시간은 결코 어리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 그들의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어른스러운 선택과 사고가 필요했을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해리엇은 임신을 할 때마다 항상 몸이 아픈 편이었는데 다섯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몸뿐만 아니라 이들 부부를 둘러싼 환경들이 폭발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젊은 부부를 응원하고 귀여워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이들의 사랑이 당연하거나 지루하게 여기기 시작하고, 다섯째 아이를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아이를 함께 돌봐주던 해리엇의 어머니는 눈에 띄게 지쳐가고, 어쩔 수 없이 고용한 도우미는 때로 오히려 눈치를 봐가기까지 한다. 데이비드 역시 다섯째 아이를 부담스러워하거나 버거워하는 듯 보인다. 다섯째 아이인 ‘벤’은 출생부터 요란하고 ‘벤’의 이상하고 통제 불가능한 특징들은 사회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


네모난 방 안의 벽은 하얗게 번쩍이는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었고, 여기저기 버튼이 달려서 비싼 가죽 소파의 모조품 같아 보였다. 마루 위 초록색 고무 매트리스 위에 벤이 누워 있었다. 그 아이는 의식이 없었다. 벌거벗은 채로 구속복 속에 있었다. 창백하고 누런 혀가 입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그 애의 살은 시체처럼 희고 푸르스름했다. 모든 것이, 벽과 마루와 벤이 똥으로 짓이겨져 있었다. 흠뻑 젖은 짚방석으로부터 고여 있던 칙칙하고 누런 오줌이 스며 나왔다. (p.222)


넷째 아이까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양육했다면 ‘벤’은 이들 부부에게 어쩌면 진정한 정서적인 첫 독립을 상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식들 중 두 사람이 온전히 부모 역할을 해야 했던 인물이 있다면 ‘벤’이고 한편으로 결혼 이전의 두 사람 역시 각자의 보호자에게 ‘벤’이었을지도 모른다. 작품 해설을 살펴보면 ‘벤’이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관점의 해석이 담겨 있다. 해리엇에게 벤은 ‘아픔,’을 뜻한다. 히브리어로 아들, 그리고 라틴어로 좋다는 의미를 연상시키는 ‘벤’은 실은 구약 성경에서 아이를 갖지 못하던 ‘라헬’이 죽은 아이를 낳으며 ‘슬픔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벤노니’라고 부르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한편 성경에서 그의 남편인 야곱은 이 아이의 이름을 ‘오른팔’ 같은 아이라는 의미인 ‘벤야민’으로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벤은 아버지가 든든하게 기대고 싶고 가장 큰 기대를 갖는 아들이면서 어머니에게는 정서적 죽음이자 가장 큰 슬픔을 안겨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부모에게 자식은 언제나 정서적 죽음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아닐까. 그리고 부모라는 역할이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멀리 내다보이는 수많은 정서적 죽음들을, 황폐해진 도시와 무너진 인간성을 지닌 사람들을 잠시 뒤로한 채 아이의 눈높이에서 다정하게 동화를 노래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는 그런 사람들. 조금 더 상징적으로 인물을 바라보자면 해리엇과 데이비드를 집단의 상징으로 여긴다면, 해리엇은 ‘가정’ 혹은 ‘소집단’의 주체가 되고, 데이비드는 ‘국가’ 혹은 큰 규모의 사회적 그룹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욕망이나 통제 불가능한 성향을 감출 수 없게 된 벤은 가족들의 두려움을 사고, 그를 넘어 동네에게 골칫거리가 되며 도시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 특별한 조치를 받아야 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고민 끝에 데이비드를 시설에 보내는 결정을 내린다. 그것이 그들의 가정을 구하고, 다른 자녀들을 두려움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벤은 타인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는 정도의 위험한 수준이다. 시설에서 역시 벤은 가장 위험한 군으로 분류되어 구속복을 입은채 인간답지 못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해리엇이 시설에 방문한 순간 벤을 다시 가정으로 데려올 수밖에 없다.


이를 기점으로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갈등이 발생한다. 사회생활에 조금 더 익숙한 데이비드가 일적인 측면으로 자식의 양육을 바라보았다면 해리엇은 본능으로 그를 대한다. 다른 많은 평론에서 사용했던 ‘모성’이라는 단어보다는 ‘혈연’으로 해석하고 싶다. 작가는 이제 독자에게 묻는다. ‘벤’을 바라보는 시선을 두고 끝까지 사회에 소속되기 위해 가르치려는 ‘해리엇’과 사회로부터 고립된 채 전체의 균형과 안정을 맞추게 하려는 ‘데이비드’ 중에 무엇이 더 별로이지 않은 선택일 것 같은지. 한참을 고민했던 것 같고, 이런 것들은 여전히 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소홀해지고 다섯의 아이를 낳았던 방은 두려움의 공간으로 변해간다. 아이들은 벤의 공포를 안은 채 잠에 들 시간이면 문을 잠그고, 해리엇은 자신이 유일하게 좋아했던 시간, 이제 잠들기 전 아이들의 자는 모습마저 자유롭게 볼 수 없다. ‘벤’이 데이비드와 해리엇에게 자유를 앗아가고 통제해야 하는 책임을 안겨주었다면 두 사람 역시 사회적으로는 ‘벤’과 다름없다.


정상적인 애도 누구나 걸음을 시작하고 나서 한 일 년 간은 가장 어려운 시기야. 자기 보호 본능도, 위험에 대한 감각도 없으니까. 애들은 의자나 침대에다 자신을 내동댕이 치고 공중으로 날고 큰길로 뛰어들고 매 초마다 감시해야 돼... 또한 아이들은 그때가 가장 귀엽고 가슴이 뛸 정도로 예쁘고 재미있지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그런 다음 아이들은 점차 분별력이 생기면서 인생은 쉬워지지. (p.186)


오래전에 나는 내 인생이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은 컴컴한 어둠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이 너무 좁았던 모양이다. 대학교 졸업을 1년 정도 앞두고 있을 무렵, 나는 내가 계속해서 실패한 인생만을 살아갈 것 같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부모님은 언제나 내 곁에 있지 않을 것이고, 내 앞으로 주어진 시간은 무한정으로 남겨져 있을 것이며 나는 외롭게 시간을 흘려보내기만 할 것 같았다. 그때는 내가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과 얻어낸 것들을 꿈꾸기만 하며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거나 우스운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당시 나는 잠을 자는 것도 버거워하며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인생에 몇 번이고 더 찾아온다. 드라마 속 인물들에게 해피엔딩과 새드엔딩이 반복되듯이 말이다.


물론 시간이 흘러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때만큼의 두려움이나 공포를 또 한 번 안은 적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분별력이 생겼고, 두려운 일들에 담담해질 줄 아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모르는 것은 너무나 많고, 해결해야 하는 숙제도 산더미이며, 나는 나의 미래를 영 모르겠다. 알 것 같다고 생각하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잘 알고 있는데, 언제나 그렇듯 뜻대로 되는 일은 잘 없으니까. 작가는 이 작품의 초반에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상반된 배경을 나열한다. 해리엇은 원만한 가정에서 자라왔으나 인정욕구가 결핍되어 있고, 데이비드는 한 번의 결혼을 먼저 실패하며 완전한 가정으로의 애정욕구의 결핍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들 결핍에 관계없이 ‘벤’이라는 존재는 누구라도 감당 불가능한 시련이 되었다. 그것을 두 사람의 환경이나 타고난 성향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벤’보다는 두 사람이 아이들을, 그리고 그들이 시련을 대하는 방식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작가가 끝내 그렸던 이들 부부의 노년의 장면까지도.


작가는 한 가정의 붕괴라거나 소외받는 인간을 그리고 있을지라도 결국 인간 개인의 고립을 그리고자 했다. 이는 결국 자신들의 꿈의 전부였던 런던의 집을 팔고 조용히 노년을 보내고자 하는 부부의 관점이 변하기 시작하는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한때의 ‘벤’처럼 통제되지 않는 자존심을 접고 현실을 마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독자라면 알 것이다. 이들에게 ‘자존심’이라 부르는 것은 사회일 뿐이고 그들 자신에게는 자존심이 아닌 ‘꿈’과 ‘희망’일수도 있을 것이라고. 결국 사회가 ‘벤’을 더 ‘벤’ 답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책의 서문에 두 사람의 캐릭터를 사회가 함부로 규정지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어느 관점으로도, 누구에게도 무엇을 규정짓는 모든 구성요소들을 두고 우리는 ‘어른스럽다’라고 단정할 수 없음까지 언제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퇴보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보수적이고 답답한 사람. 수줍고 비위 맞추기 어려운 사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이렇게 불렀지만 그 외에도 그들에게는 좋지 않은 형용사들이 끝없이 붙어 다녔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생각을 완강하다고 할 수 있으리만치 옹호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이며 그렇기 때문에 감정적 까다로움이나 절제가 단지 인기 없는 자질이라는 이유로 비판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p.4)



#003 2026.1.17 도리스레싱, <다섯째아이>,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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