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어쩌면 내 사랑은 지구 반대편에 있을지도 몰라!

아무튼, 쉐어하우스 (8)

by 곽민주

어느 저녁, 퇴근을 하고 돌아오니 리사가 엘비 언니와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신발을 벗고 부엌을 지나가는데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 복도를 지나 방으로 가는 발걸음을 돌린 채 재빨리 식탁 앞에 앉았다. 그러자 리사가 흠칫하며 놀라서는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손으로 가린다.


"뭐야?"


내 물음에 리사가 얼굴을 붉힌다.


"아니.. 그러니까... Just.."

"틴더."


엘비 언니가 팔짱을 낀 채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엘비 언니는 나보다 세 살 정도 많은, 영국인이다. 그러니까 사건은 이렇다. 지금껏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 없는 리사가 엘비 언니에게 연애 상담을 해온 것이다. 내용의 요지는, 도대체! 어디서! 남자를 만나는 것이냐고!!


엘비 언니 역시 연애 고민으로 한차례 마음을 앓고 있을 때였다. 엘비 언니는 지금 사랑에 빠졌다. 그녀의 짝사랑 상대는 한국어를 가르쳐 주는 화상 통화 선생님. 날마다 30분씩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절로 마음이 싹텄다고 했다. 평소 카톡을 나눌 때에도 다정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그와 자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좋은 사람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여기에 중요한 사실이 있다. 리사도, 엘비 언니도, 나도 모두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엘비 언니가 리사에게 "틴더" 라는 호기심 상자를 던진 것이다.


.... 그렇게 어느 여름밤, 모솔 셋이 모여 사랑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사랑이라. 쉐어하우스에 지내면서 나눴던 이야기의 갈래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가 한국의 문화, 둘째가 세계의 문화와 정세, 셋째가 사랑이었다. 사랑 이야기는 언제 꺼내도 재밌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연애를 해본 경험이 없는 입장에서, 내가 생각하는 연애는 너무 궁금했다. 리사와 나는 그런 면에서도 쿵짝이 잘 맞았는데 쉐어하우스에서 친하게 지낸 대부분의 룸메이트 중 모솔인 친구들이 나와 엘비 언니, 그리고 리사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도 새로운 룸메가 자신의 연애 이야기를 시작하면 호들갑을 떨며 얼른 이곳으로 오라고 연락을 하곤 했다. 그 모습에 쉐어하우스의 다른 룸메들은 자주 낄낄대며 웃었다. 우리 역시 킥킥거리며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이제 대학교 2학년이 된 리사는 방에 돌아올 때마다 푸념을 하곤 했다. 그러니까 리사의 고민이라면... 대부분은 썸에서 끝난다는 것이었다. 리사가 마음에 둔 사람은 리사를 좋아하지 않았고, 리사가 관심이 없는 친구는 리사에게 관심을 보였다. 리사가 물었다. 민주, 사랑에 빠진 적이 있어?


사랑에 빠지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울까? 20대가 지나는 동안 소개팅이나 미팅을 안 해본 건 아니다. 연락처를 적어 둔 쪽지를 손에 꼭 품은 채 높낮이가 다른 대강의실 한쪽에서 누군가의 옆모습을 흘깃거린 적도 있다. 일을 하면서도 거래처 상사나 동료들의 부추김에 여러 번 이성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좀체 호기심일 뿐, 마음이 요상해지지 않았다. 사람을 아끼고 좋아하는 마음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10대 시절엔 '이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20대엔 연애보다 더 자극이 될만한 일들이 많았다.


20대를 보내는 동안의 나는, 사랑을 원하거나 구하지 않아도 내 인생은 전혀 살아가는 데 아쉽지 않았다. 노트북이 든 가방 하나만 챙겨서 연남동 플리마켓만 돌아도, 길거리 토스트만 사 먹어도 행복감이 차올랐으니까. 각종 영화제와 문학행사를 돌아다니며 좋아하는 감독과 작가의 사인만 받아도 1년이 훌쩍 흘렀다. 아르바이트로 하루를 보내다 보면 방학은 훌쩍 지나갔다. 틈새엔 나처럼 혼자서 많은 새로운 자극들을 받아들이는 친구들과 함께하다 보면 외로울 틈 같은 건, 이 넓은 세상에 한 사람에만 집중하겠다는 마음가짐 같은 건 아예 싹도 트지 않았다. 학부를 졸업할 무렵엔 취업을 했고, 돈을 벌고 쓰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렸다. 그 시기엔 내가 번 돈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게 즐거웠고, 내게 맞는 패션 스타일을 찾아가는 과정도 재밌었다. 그렇게 금세 중반과 후반을 향해 달려가버린 것이다.


내 인생 첫 미팅은 대학교 2학년, 학교 앞의 어느 호프집에서 이뤄졌다. 체대생 네 명이 쭐래쭐래 나왔는데 내가 호기심에 미팅에 나온 것처럼 그 애들도 치킨 먹구 노래나 왕창 부르고 싶어서 나온 것 같았다. 나와 함께 미팅에 나왔던 동기들은 오기 전부터 호프집 앞의 백화점에 들러 립스틱을 바르고 매무새를 점검했는데 그 애들은 자기네 과 티셔츠를 완두콩 사형제처럼 입고 있었다. 드라마 속 미팅은 설레고 몽글몽글하던데 겉바속촉 양념치킨에 홀린 우리는 치킨 칭찬을 하다 학교괴담을 이야기하다 노래방에 갔다. 김광석이었는지 버즈였는지 나중엔 남자 애들끼리 서로 목청 높여 노래대결을 하다 시시하게 끝이 났다. 다음날 도서관에 가는 길에 옆 건물에 체대가 있어 지나가다 어제의 완두콩 형제 중 셋째와 마주쳤는데 전날 치킨으로 퉁퉁 얼굴이 부은 나와 달리 셋째의 얼굴은 팽팽해 보였다. 내 얼굴을 보고 쿡쿡거리며 지나가던 셋째의 뒷모습을 쏘아보며 다시는 그 길로 지나가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 길은 우리 학교에서 벚나무가 마주 본 채로 둘레둘레 길을 만들어 놓은 벚꽃명소, 도서관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생애 첫 소개팅을 하게 되었다. 방학 때였는데 석촌호수 근처에 있는 엔제리너스에서 보기로 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디저트류가 많지 않았던 데다 친구들과 카페에 가면 '허니브레드'를 가끔 주문해 먹었는데, 허니브레드를 사주는 선배가 있으면 무조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였다. 첫 소개팅을 앞두고 전날밤 소개팅을 주선한 친구가 말했다.


'그 사람이 마음에 들면 허니브레드를 나눠 먹구,, 그렇지 않다면... 얼른 끝내구 와! 나랑 먹자!’


입시를 하며 빠졌던 10kg은 1년 사이 금세 불어나 있었고, 나는 잘 잠기지 않던 치마를 입고 좀체 신지 않던 굽 높은 구두를 신은 채 엔제리너스에 앉아 있었다. 약속시간 보다 먼저 와 옆 테이블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허니브레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멍하니 식빵 속으로 촉촉하게 녹아드는 생크림과 주욱 찢어지는 식빵의 결을 바라보는데 내 앞으로 똑똑하며 누군가 테이블 위에 주목을 콩 하고 쳤다. 그 애는 나보다 한 살이 어렸는데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한참이나 귀가 빨개져 있었다. 나는 혹시나 내가 허니브레드를 보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나 싶어 황급히 입을 닦았다. 둘 다 커피를 주문했는데 허니브레드는 주문하지 않았다. 그 애도 밥이라도 먹자고 할 줄 알았는데 금세 일이 있다며 가봐야 한다고 했다. 훠이훠이 가라며 손을 흔들고 근처의 교보문고로 갔다. 그리고는 김숨 작가의 <이혼>을 읽었다. 김유정 문학상 수상작이었다. 그 소설을 읽으며 생각했다. 봄 감자가 맛있다더니, 여름이라 마음이 팍 상하네. 역시 여름엔 소개팅을 하는 게 아니야.




"민주, 소개팅 한 번 안 해볼래?"


부엌에서 라면에 계란을 동동 띄워 한 입 먹으려는데 엘비 언니가 내 앞에서 오이를 썰며 말했다. 전날 언니와 리사와 틴더를 두고 이야기를 하다 "우리는 왜 연애가 어려울까?"로 대화가 번졌다. 아마도 다들 처음이라 설레임이 뭔지, 좋은 게 뭔지를 잘 몰라서, 어색해서 그런 게 아닐까. 내 물음에 언니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자기 친구를 소개해주겠다고 대뜸 말했다. 나는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민망해서 말끝을 흐렸다.


나는 한 젓가락 하려던 라면을 내려놓고는 언니를 바라보았다. 지난밤, 괜히 밥 한 끼 하자고 했다 선생님과 관계가 깨어질 것 같아 걱정이라는 언니에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 보라고 응원했었다. 언니는 우리 모두 사랑을 하자며, 손뼉을 마주쳤다. 사실 리사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고, 마음이 없는 친구들로부터만 고백을 받았는데 그건 언니도, 나도 우리 모두의 공통된 문제이기도 했다. 게다가 우리는 첫 연애는 무조건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받아내야 한다는 암묵적인 다짐을 한 터였다.


"내가 영국에 살 때 유학을 왔던 친구야. 한국인. 민주보다 네 살이 많아. 그 친구는 이번 주에 시간이 된대!"


언니의 말에 오래간만에 가슴이 콩닥거리면서도 준비한 게 아무것도 없는 소개팅에서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내가 망설이며 거절하자 언니가 웃으면서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럼, 이렇게 하자. 리사랑 나랑 넷이서 밥 한 끼 먹는 거야. 그냥 친구들 소개시켜 주는 거지."


그 길로 라면을 먹지 않고 몇 날 며칠을 쫄쫄 굶었다. 한창 패션에 눈을 뜰 때라 가죽치마라던가 이상한 패턴 달린 옷만 사모으느라 내가 가진 옷 중에는 단정하고 평범한 옷이 없었다. 전날 저녁 리사와 가로수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얌전해 보이는 치마와 구두를 샀다. 약속 당일, 거울을 보며 공들여 화장을 하자 리사가 나를 놀리며 킥킥거렸다. 우리는 성북동에 있는 한 식당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나는 내가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의 입장에선 내가 리사 또래의 어린애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메뉴를 주문할 때부터 집에 갈 때까지 손가락을 튕기듯 쉴 새 없이 사람을 놀리듯 장난을 쳤다.


나중에 언니에게 듣기로 그 사람은 1년 전에 한국에 돌아왔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온 이유는 영국인인 여자친구와 헤어졌기 때문이었다. 언니도 알고 있는 4년을 함께한 친구라고 했다. 그 사람에게 그 여자친구는 아직 마음 한편에 깊이 박혀 있는 존재인 듯 보였다. 학생에서 회사원으로, 다시 한국에서의 일상을 보내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알아차리지 못할 때, 그 사람은 전 여자친구를 돌이켜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그리워하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사랑이란 건 뭘까?”


그날 엘비 언니가 내게 물었고, 나와 리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때 우리 세명에게 연인 간의 사랑이란 가볍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동화 속 이야기처럼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후련해지는 기분이 드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한편, 리사는 새로운 짝사랑이 시작됐다. 지하철에서 우연히 맞은편에 앉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눈을 떼지 않고 두 정거장을 지나치도록 서로를 바라보았다고 했다. 리사의 말로는 강렬한 시그널을 느꼈대나 뭐래나. 세 번째 정거장쯤에 남자가 일어나 리사에게 연락처를 물었다고 했다. 그렇게 일주일 연락을 하고 첫 만남은 인사동에서. 나는 특별히 리사를 위해 인사동의 핫하다는 모든 카페를 다 찾아보았다. 리사는 마치 시상식에나 입고 갈 듯한 커다란 코사지를 블라우스 한쪽에 달았다. 맨 얼굴로 다니던 평소와 달리 두껍게 화장을 하고, 곱슬거리는 긴 머리카락도 묶었다. 그날 리사는 내가 알던 귀엽고 깜찍한 동생이 아니었다. 이제 와 고백하자면 화장이 매우 투박하고, 촌스러워 너무너무 귀여운 다람쥐 같았다.


언니는 한국어 선생님에게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선생님은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다. 언니는 러닝을 하러 한강으로 달려갈 준비를 하는 내내 생화를 부엌 한 켠에 예쁘게 장식해 두고는 콧노래를 불렀다. 환기를 하자며 창문을 열자 쌀쌀한 바람이 조금 새어 들어왔다. 이제 가을이 오려나? 내가 중얼거렸고, 두 사람은 한창 마음이 들떠 내 말은 귀에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한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 반쪽은 어쩌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것인지도 몰라. 눈을 감으면 머릿속으로 수많은 국기가 지나쳐갔다. 그런 생각은 쉐어하우스를 나오고서도 계속됐다. 도대체 어디에 내 반쪽이 있는 걸까?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는 하는 걸까? 이렇게 엉뚱하고 어리광이 심한 나의 본모습을 들킬 사람이 있을까? 그즈음 나의 홀로 살아가는 노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게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영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 같았다. 그럼 내 반쪽은 우주에 있으려나? 몇 백만 광년을 멀리 떨어져 있는 거야!


침대에 누워 괜히 마음이 상해 눈물을 또르륵 흘리고 있는데 리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리사는 방을 어수선하게 왔다갔다하며 내게 데이트를 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인사동에서 크레페 먹고 커피 마시고, 파스타 먹었다고 했는데 너무 이야기가 잘 통하더라고,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 남자의 나이가 너무 많다며(리사와 열 살 정도 차이가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민하는 밤을 보냈다. 그러나 다음날, 그 남자로부터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는다며 실의에 빠졌다. 엘비 언니 역시 저녁 약속을 한 시간 앞두고 바람을 맞았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한국어 선생님을 교체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구겨진 마음을 팽팽하게 만들어주는, 피자를 주문했다.




몇 개월 전, 리사가 한국에 들어왔다. 몇 년만에 보는 거였다. 리사는 오래 전의 그때와 같은 모습이였고, 리사 역시 우리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가끔 리사와 안부를 물을 때면 우리의 첫인사는 자연스레 그래서 요즘 연애는 어때?였다. 리사는 아직 연애를 하지 못했다. 기회는 많았는데 사랑의 감정을 잘 모르겠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리사의 나이가 이제 스물여덟쯤 되었을까. 그날 리사에게 나도 같은 고민을 그즈음에 했던 것 같다고 나는 말해주었다.


“도대체 사랑이 뭘까? 사랑이 필요할까? 나는 언제까지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게 되는 걸까?”


사랑에 시름시름 앓는 것 같다가도 한식집에서 리사는 딸기 막걸리가 매우 맛이 좋다며 금세 얼굴을 폈다. 리사의 잔과 잔을 부딪히며 나는 말해주었다.


“Destiny. And effort.”


몇 년 전 나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극도로 부인하고 싫어했다. 그건 리사도 잘 아는 사실이다. 운명 같은 건 없다고, 취업준비를 할 때에도 리사에게 운명에 기대지 말고 기회를 잡으라고 단단히 일러주었던 나였다. 그런 내 입에서 ‘데스티니’라는 말이 나오자 리사가 입에 물었던 육회를 주르륵 흘렸다. 나보고 변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날 리사에게 내 이야기를 해주었다. 운명과 노력. 운명과 노력이 함께하지만 운명이 더 먼저인 것 같다고. 인생의 어떤 것들은 내가 간절히 원해도 얻을 수 없는 때가 있고, 본래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았을 때 찾아오는 인연도 있다고. 그 이후엔 스스로에게나 상대에게나 노력이 많이 필요한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도대체 사랑이 뭐냐고 묻는다면, 내게는 순응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 인생의 기준이 되는 것 같고, 운명이 되는 것 같고, 미래가 되는 것 같다. 사랑은 나의 높다란 자존심과 호기로 쌓아 올린 기세를 꺾게 만든다. 이유를 모르겠는데, 어린아이처럼 자꾸만 관심을 받고 싶고, 안겨 있고 싶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 그런 한편으로 그 사람만의 어른이 되고 싶다. 그의 순수함과 세계를 잘 지켜주고 싶다. 서른이 되어 내게는 삶을 계속해야 할 이유 그 자체가 된다. 좀체 앞을 알 순 없지만. 연인 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쉐어하우스에서 룸메이트를 만나게 되는 그 모든 과정들이 내게는 운명이지 않았을까 싶다. 많고 많은 집 중에 그 집이었던 것도, 그 집에 그들이 있었던 것도 모두 운명이다. 그 뒤에 그들과 친해지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건 나의 노력이지. 지금의 관계를 지속하게 되는 것도 나의 노력. 문득 친구들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피어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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