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who laughs last laughs best
그는 현시대 여성들이 승리하길 바랬던걸까. <아가씨>와 <스토커>를 연이어 감상한 후에 내 머리에 남았던 것은 원하는 것을 성취한 여주인공들의 미소었다. 각각 마지막 씬을 주목해보면, 히데코와 숙희는 서로를 다시 마주보며 관계를 맺고, 인디아는 총과 함께 아버지의 벨트를 차고 있다. 그리고 옅은 미소를 짓는다.
사실 <아가씨>는 박찬욱 감독이 대놓고 자신의 여성관에 대해 표현한 영화다. 시대적 상황을 일제감정기로 설정하여 무언가에 억압되어있고, 어딘가 모르게 무거운 공기가 흐르게 했다. 남성들은 여성들의 성적 도구로 이용하며 폭언과 폭력을 일삼았다는 것을 코우즈키를 통해 보여주었다. 아내와 히데코가 나눈 작은 농담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보일 때 두 손으로 그들의 얼굴을 뭉개며 작은 숨결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숨소리 하나도 그들의 의지대로 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여성들이 살아남아 승리한다는 것은 영화에서 표현한 것보다 더 엄청난 공을 들인 일이다. 히데코와 숙희가 처음 관계를 맺은 날, 둘은 서로의 손을 굳게 악수하듯 잡고 사랑을 나눈다. 단순한 성관계가 아닌, 그 둘의 단결의 시초임을 보여주는 듯 했다. 또 강인해보이기도 했다. 아직까지 내 머릿속엔 남성이 여성을 보호해주었을 때, 남성의 강인함이 더 아름다워 보였다. 이 영화는 그 머릿속을 뒤집어 놓았다. 히데코가 코우즈키를 성적도구로 이용해왔음을 알게 된 숙희는 차오르는 분노를 서재에 있는 책들을 갈기갈기 찢으며 표출한다. 그 행동을 오랫동안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 많이 아팠음에 눈물을 흘리기 보다는 늘 남성만 보여주던 행동을 숙희는 행하였다. 강인해보였다. 남성에게만 있을 줄 알았던 사랑의 분노는 여성에게도 있었다. 또한 숙희는 씩씩한 캐릭터이다. 만화영화 <달려라 하니>의 하니 같기도 하다. 지금까지 나온 씩씩한 여성캐릭터는 들려오는 말에 굴복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는 오뚜기 모습이었다. 하지만 숙희는 오뚜기를 넘어섰다. 백작의 성기를 부여잡으며 다신 자기를 조롱하지 말라는 경고까지 한다. 그냥 홀로 우뚝 서는 하니가 아닌, 두 번 다시 건들이지 못하게 창살까지 설치해버린다.
여성의 강인함은 이들의 사랑뿐만 아니라 복수를 통해서도 드러나는데,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도 함께 떠올려진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던 질투와 시기를 참지 못하는 귀여운 악녀가 아니다. 복수의 대상이 처참하게 무너지길 원했고 차분하지만 강인하게 행동했다. 두부를 과감히 던지거나 너나 잘하라며 조용히 읊조리는 그녀는 귀여운 악녀가 아닌 복수에 갈망하는, 살벌하고 무서워 보이기고 한다. <아가씨>의 숙희와 히데코의 복수도 그러했다. 자신들이 그동안 어떤 취급을 받아왔는지를 잊지 않고 침착하게, 계획적으로 행동한다. 둘의 연합작전이 시작되었을 때 오히려 남자 배우들이 조금 어리석어보이게 까지 만들었다. 우리 일상에서도 라이벌이 한명이라도 존재하게 되면, 성취욕구는 두배이상으로 올라간다. 백작과 코우즈키를 라이벌 마냥 이겨버려야했던 히데코와 숙희는 모든 행동들의 욕구와 열망이 평소보다 두배 이상 올라갔다. 이것이 그들을 더욱 살벌하고강인하게 보이게 만들기도 했다.
<박쥐>까지만 해도 박찬욱 감독의 여성관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여전히 남성이 여성을 보호하였고 특히 태주는 누가봐도 가녀린 여성이었다. 상현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할 수 있는게 없이 부성애를 자극하였다. 그의 여성관이 바뀌기 시작한건 <스토커>부터 였을까.
처음엔 인디아와 태주가 꽤 비슷하다고 느꼈다. 누군가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고, 비주얼 측면에서도 어딘가 모르게 가녀리며 부성애를 자극했지만 태주는 역시 상현없인 안되었고 인디아는 홀로 이겨냈다. 상대방을 뾰족한 연필로 찌르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자신을 지켜냈다. 총과 아버지의 밸트로 끝까지 자신을 지켰다. 인디아는 욕망을 억누르고 그 욕망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살아오던 소녀이다. 찰리 삼촌은 그런 인디아를 눈빛과 몇 번의 접촉만으로 그녀의 욕망을 찔렀고 살인을 통해 성적욕구를 완전히 끌어올렸다. 인디아가 홀로 샤워를 할때는 어딘가 모르게 혼란스러워보였다. 살인을 눈앞에서 보았음에 두려워하던 모습인줄 알았지만 그녀는 욕망이란 것을 처음 깨달은 것이다. 결국 자위도 서슴치 않게 된다. 여자 주인공의 이런 모습이 새로웠다. 요즘은 페미니즘 시대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 매체를 통해 그런 여성들의 과감하고 오픈된 모습을 많이 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인디아라는 여자주인공이 욕망을 깨닫고 억누르지 않게 되는 과정까지의 모습을 스크린을 통해 보는 것은 대한민국 영화계의 첫도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삼류영화나 포르노에서 볼법한 더러운 모습이 아닌, 아름다운 모습을 박찬욱 감독은 담아냈다. 이 욕망은 인디아를 승리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작은 욕망조차도 커지게 된다면 우리 환경을 지배해버린다. 식욕도 별거 아니지만 이것이 커진다면 일에 집중을 못하고 평온했던 성격을 예민하게 바꿔버리기도 한다. 영화에 다뤘던 욕망은 식욕보다도 컸고 그 욕망은 더더욱 커져갔다. 그것은 인디아를 충분히 바꿀 수 있었고 여자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어 어쩐지 반갑기까지 했다. 공감이 갔기 때문인 것 같다. 여성들에게도 어떤 종류던지 욕망이란 것은 당연히 있기 때문이고 그걸 스크린을 통해 보는 일이 희귀하기 때문에 반가웠던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와 <스토커>를 통해 여성의 승리, 차분함 속에 내제된 강인함, 당연시 지니고 있는 욕망을 보았다. 우리는 이 세가지를 숨기거나 실루엣마냥 보일락말락 하는 것이 매력적인 여성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감히 커튼을 열고 공개되었을 때 그것은 아름답게 보일 수 있었고 훨씬 매력적이었다. 이런 여성의 모습이 박찬욱 감독에게서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크다. 페미니즘 시대라고 불리는 현시대이다. 성적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소리치는 미투운동도 여전히 뜨겁다. 여성은 이제 목소리를 내고 도망치지 않으려하는 것 같다. 난 이 사회적 현상들의 흐름이 여성이나 남성중 누가 더 우월한지를 가리는게 아니라, 여성들에게서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었던 더 다양한 모습들이 과감하게 보여주었으면 한다. 영화처럼 그들의 짓밟아서 승리하는 여성의 모습이 아니라 드러냈기 때문에 승리했던 모습이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