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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치 Jan 23. 2019

버닝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이창동 감독의 공백 8년 동안 큰 변화는 없다. <밀양>에서 본 듯한 낡은 집과 응답 없는 전화. 현실감 있는 생활연기. <버닝> 초반의 미장센부터 이창동 감독의 성향이 묻어났다. 또한 자연, 시골, 그리고 상위계층과 하위계층 간의 거리를 그려내는 것도 고집하였다. 가장 달라진 것이 있다면 ost이다. 이전까진 음악보단 배우들의 표정과 행동들을 통해 긴장감을 주었다면 이번 영화의 ost는 신의 한수이다. 훨씬 비밀스럽고 세련되게 긴장감을 주었다. 큰 변화가 없어도 ost만으로도 낡은 집에서 새집으로 이사한 것이 아니라 몇 번의 페인트 칠을 통해 리모델링한 느낌이었다.
 

 종수와 해미는 경제난과 외로움이 늘 동반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 둘이 만나 좁은 방에서 하루에 딱 한 번만 들어오는 빛을 느끼며 관계를 맺었다. 종수는 해미가 옆에 있지 않음에도 빛을 받으며 좁은 방에서 자위를 한다. 단순히 성욕을 푸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모르게 편안하고 안정되어 보였다. 그리고 해미를 바라봄으로써 작은 방과 해미는 종수에게 안정감을 주는 매개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랬듯, 외로움은 또 다른 외로움이 위로해준다.
 벤의 등장은 꽤나 당황스러웠다. 술에 취한 해미가 눈물을 흘리며 아프리카 여행 중 받은 감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 종수는 그저 안쓰러웠지만, 벤은 그녀의 눈물을 그저 신기해하기만 한다. 누군가의 눈물에 마음이 아프다면 그 사람의 마음을 공감하기 때문이다. 벤은 그녀를 전혀 공감하지 못했고, 연인이라고 하기엔 알 수 없는 거리감이 보였다. 하지만 해미는 종수의 낡은 트럭이 아닌 벤의 포르셰에 올라탄다. 종수는 비참했을 것이고 해미는 그걸 읽었을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해미가 종수를 특별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벤의 대사를 통해 전해진다. 특별하게 생각한 종수가 아닌 포르셰를 택한 해미. 우린 이제 인간에 대한 특별함 보단 돈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벤에 대한 당황스러움은 등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의 친구들을 불러 모아 해미와 종수를 소개해준다. 술에 취한 해미는 그레이트 헝거(hunger)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춤까지 따라 한다. 종수는 의아하다. 만약 이 여자를 사랑한다면 조금씩 비웃는 친구들을 나무라거나 해미를 말려야 할 텐데. 벤은 몰래 하품을 한다. 지루하다는 듯이. 어쩌면 벤은 감정을 모르는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때부터 들었다.
 종수의 집을 찾아온 해미와 벤. 그리고 셋은 대마초를 피게 된다. 넋을 넣고 바라본 장면이 여기서 나온다. 대마초에 기분이 좋아진 해미는 옷을 벗고 춤을 추며 노을을 즐긴다. 마치 세상에 해미만 있는 듯하다. 영화에 나온 해미의 표정 중 가장 행복해 보였고 자유로웠다. 괜히 대리만족도 느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내가 감히 경험해보지 못한 자유와 황홀함. 만일 이창동 감독이 이 장면을 넣은 의도가 대리만족이 있다면 대성공이다. 그리고 흔들리는 잎사귀 소리를 통해 바람을 보여주며 마무리한다. 지금까지의 흐름과 장면들을 통해 이창동 감독의 기획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누리고 있는 자와 굶주리고 있는 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 가지 키워드에 주목해보기로 했다. 첫 번째는 ‘그레이트 헝거’이다. 그레이트 헝거는 음식만으로 허기를 달래는 차원의 굶주린 이가 아니다. ‘삶의 의미’라는 정신적인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다. 해미와 종수는 그레이트 헝거였다. 리틀 헝거는 음식으로 굶주림을 채울 수 있지만 그레이트 헝거는 도대체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몰라 종수와 해미는 방황했던 걸까. 영화를 보고 난 후, 어딘가 모를 쓸쓸함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그레이트 헝거라는 것을 알았다. 이창동 감독은 우리 모두 그레이트 헝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나 보다. 우린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을 여러 가지 욕망을 통해 해결하려 하고 후회하고 혼란스럽기를 반복한다. 그 혼란은 영화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화의 전개는 혼란스럽고 종수 또한 영화 내내 혼란스럽다. 그런 관점에서 보니 이 영화는 참 솔직하고 투명하다.


 두 번째는 ‘우물’이다. 아무도 우물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종수, 해미, 종수의 엄마는 우물을 기억한다. 우물을 기억하는 자들의 공통점은 외롭고 빈곤했다. 그레이트 헝거만이 볼 수 있는 우물이다. 텅 빈 하늘을 바라보며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러 오길 한참을 기다렸던 해미, 그 해미를 구해준 종수. 해미의 자취방에서 그러했듯이, 외로움은 또 다른 외로움이 위로해준다. 이창동 감독의 성향이 파악되는 구간이기도 하다. <밀양>에서 외로운 신애 옆에 외로운 종찬이 옆에 있어줬던 게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이창동 감독은 백마 탄 왕자님과 같은 기적을 그려내질 않는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나와 같은 사람이 늘 내 옆에 있는 것을 말하려 한다.
 세 번째는 ‘바람’이다. 해미와 바람의 동반은 해미가 대마초에 기분이 좋아져 춤을 추고 난 뒤부터 등장한다. 해미가 실종되고 난 후, 종수가 해미를 찾으러 다닐 때에도 마다 바람 소리가 늘 곁에 있다. 사라진 해미가 바람으로 돌아온 걸까. 또한 바람은 해미와 종수의 외로움을 더 부각해주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에 바람이 불면 그 불이 더 커지듯, 그들의 타고 있는 듯한 마음과 외로움이 점점 더 커짐을 느낄 수 있었다. 루시드 폴의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라는 가사 중, ‘혼자라는 게 때론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살아가는 게 나를 죄인으로 만드네’라는 가사가 있다. 영화 속 바람 소리를 듣고 이 노래가 생각이 났고 이 가사는 마치 해미와 종수의 심정을 말하는 듯했다. 분노조절장애의 아들인 이유로, 카드빚을 다 갚지 못한 이유로 그들은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죄인이게 만들었다. 외로웠을 것이다. 정말 이 노래 제목처럼 이들의 외로움을 커져만 가게 하는 바람은 어디서 부는 걸까.


 여전히 의문인 점은 비닐하우스의 정체이다. 한국 경찰들은 관심 없는 많은 비닐하우스들은 태워지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벤이 태우겠다고 한 비닐하우스는 해미만이 아닌, 우물이 보이는 그레이트 헝거들을 통틀어 뜻할지도 모르겠다. 벤은 해미를 살해함으로써 태워버렸고, 종수에게는 비닐하우스를 태워버릴 거라는 선전포고와 동시에 해미의 실종에 덤덤히 반응함으로써 종수를 혼란스럽게 만들게 하며 태워버렸다. 하지만 종수에 의해 벤도 결국 타버렸다. 탄탄한 경제력과 적당한 인맥으로 가득한 벤은 그레이트 헝거에서 당연히 제외시켰는데, 결말을 생각해보면 벤도 그레이트 헝거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이창동 감독은 비닐하우스에 대해 투명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비닐로 덮여 무엇을 채울 수도 넣을 수도 없다. 종수가 앞으로 무슨 소설을 써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말했듯, 우리도 앞으로를 모른다. 채워지지 않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모른다. 종수가 혼란과 분노에 버닝(burning) 되고 난 뒤, 해미의 자취방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어떤 소설인지는 담아내지 않았지만 종수는 새로움에 발을 내밀었다. 비닐이 벗겨진 것이다.


 우린 그레이트 헝거들이다. 비닐로 덮여 채워지지 않은 갈급함에 혼란스러워한다. 그리고 어디에서 부는지도 모르는 바람에 우리의 갈급함은 더 활활 타오른다. 하지만 종수를 보니 희망이 생긴다. 활활 타올라 태워지고 난 다음엔 비닐이 벗겨져 무언가를 채워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내 생각이 맞다면 바람이 조금 더 세게 불어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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