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프롬실루엣 Mar 04. 2019

8월의 크리스마스

8월의 산타클로스


1. 초원사진관     


 초록색과 빨간색. 크리스마스가 연상되는 컬러의 간판을 걸어 둔 동네 사진관. 주인공 정원이 운영하는 사진관이다. 남녀노소 사진을 찍고 현상하기 위해 이 곳을 찾는다. 어린아이들은 같은 반 친구들과 찍은 단체 사진을 들고 와 가장 이쁜 여자 친구를 확대해달라고 하기도 한다. 이런 엉뚱한 주문에도 정원은 허허 웃으며 오히려 장난을 친다. 그렇게 사진관 내부에는 사진사의 정겨움과 옛 사진기들로 가득하다. 나의 어린 시절, 아빠를 따라나선 사진관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2. 여름     


 영화 속 계절은 한여름이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뜨거운 계절. 내가 본 로맨스 영화의 계절은 유독 여름인 경우가 많다. 사랑과 여름. 그러고 보니 둘은 꽤나 닮아있다. 그 둘의 온도는 특히나 닮아있다. 아주 뜨겁다.      

 사랑은 가장 절제하기 힘든 감정이다. 쉽게 타오르고 열정적이다. 견고하던 내 일상을 뒤집어 놓기도 한다. 이 뜨거운 움직임은 여름과 닮아있다. 발걸음 하나에도 땀이 주르륵 흐르듯, 사랑을 향한 첫 발걸음은 큰 변화를 준다.


 추운 겨울에 사랑하는 사람이 따뜻한 손난로를 건네주는 것도 낭만적이지만, 뜨거운 여름날 나란히 선풍기 바람을 쐬며 더위를 쫓는 것도 낭만적이다. 정원이 다림에게 건넨 아이스크림, 선풍기 바람처럼 말이다. 그래서 여름날의 로맨스 영화가 색다르고 좋다. 여름이 지나면 차가운 온도가 찾아오지만, 그걸 알면서도 우린 뜨거움을 즐기니까.                




3. 정원과 다림     


 정원은 책임 성향이 강하다. 정원에겐 죽음이 찾아오고 있고, 몸도 마음도 무너져있다. 하지만 자신이 떠난 후, 홀로 남을 아버지, 사진관, 친구들을 위해 힘쓴다. 비디오 트는 법을 몰라 헤매는 아버지를 보고 속상한 마음에 소리치지지만 펜을 들고 매뉴얼을 만들어준다. 친구들에게 자신의 비극을 신세 한탄하기보다는 그저 웃고 떠드는 시간을 함께한다. 다림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않았던 것도 어쩌면 책임 성향 때문이다. 자신이 떠나버리고 나면 다림이 힘들어할걸 알기에, 그 힘든 순간도 책임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진 않는다. 신중하고 조심스럽다. 이런 정원에게 치명적인 매력은 다정다감함이다. 이런 남자와 연애하면 내내 사랑받는 기분일 것 같다. 독사진을 다시 찍으러 온 할머니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할머니 젊으셨을 때 너무 고우셨겠어요.” 이런 말을 듣고 행복해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상대방을 배려하며, 포근하게 만들어주는 정원의 미소와 말을 기억하고 배워나가고 싶다.  

    

 다림은 즉흥적이 스타일이다. 생각나는 것은 바로 행동에 옮기고 본인의 마음과 상태에 충실한다. 불쑥 찾아와 “사진관 구경해도 돼요?”라고 묻는다거나. “아저씨는 몇 살이에요? 결혼했어요?”라고 물으며 궁금한 것은 바로 풀어버린다거나. 약속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고 한참 뒤에  그냥 오기 싫어서 안 왔다며 또 불쑥 나가버린다거나. 신중한 정원과는 정반대의 성향이다. 정원의 눈엔 자신과 반대되는 모습에 더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정반대의 두 성향이 만났을 때 나타나는 시너지 효과는 생각보다 크다.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기도 하고 장점을 더 빛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을 마주하는 것은 매력적이다. 그만큼 다양한 시너지 효과를 경험할 수 있으니.    



            

4. 특별한 평범함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다림을 발견한 정원. 정원은 짐을 스쿠터에 실어주며 스쿠터로 목적지까지 데려다준다. 두 사람은 스쿠터를 타고 동네를 누빈다. 다림에게 정원은 좋아하는 남자 없냐며 간지러운 질문도 한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애정 하는 장면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일상은 특별하지 않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걷고, 장난치고, 가끔은 간지러운 질문을 내뱉는 것을 같이 하는 것일 뿐이다. 평범하다. 이 평범함은 우릴 웃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 이걸 알면서도 나는 습관처럼 욕심을 부렸었다. 더 많은 것을, 더 특별한 것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소소한 일상만으로도 만족했고 충분하다는 것을 잊고 산다. 너무 많은 것을 상대에게 바라며 이것이 사랑이라 우기진 않았을까. 역시 나는 사랑이 제일 어렵다.      



          

5. 죽음에 대한 불안     


 정원이 늘 차분했던 것은 아니다. 손톱을 깎다가 눈물을 흘리고, 술에 취해 경찰서에서 난동을 피우기도 하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열하기도 한다. 늘 웃던 사람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 더욱더 마음이 아프다. 홀로 꾹꾹 아픔을 삼켜냈을 것이다. 더 살고 싶다며 소리치고 싶었을 것이다. 다림을 그냥 꼭 한번 안아주고 싶었을 것이다. 죽음은 이렇게 많은 것을 참아야 하고 불안하게 한다. 그런 정원을 보며 소용없는 위로라도 건네주고 싶었다.      

 내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면 이 일상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당연하게 흘러갔던 것들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해지지 않는다. 소중하고 아쉽다. 어쩌면 소중함을 당연하게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떤 마음인지에 따라 시선은 늘 변한다.            



    

6. 만년필, 필름


 영화에는 필름, 만년필이 나온다. 오랜 시간을 투자하고 묵묵한 기다림이 필요한 물건들이다. 담백한 분위기의 영화 속, 느린 물건들이 나오니 조화롭고 평화로웠다. 정원의 성격과도 어울렸다. 어딘가 모르게 여유가 느껴지는 정원을 더 돋보이게 해 준다.   



        

7. 담백한 영화     


 영화는 우리에게 감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덤덤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다림이 정원의 팔짱을 끼는 것 외에는 깊은 스킨십 한 장면 없다. 그럼에도 이 둘의 사랑이 애틋함이 느껴진다. 이 영화가 내게 긴 여운을 준 이유는 담백해서이다. 담백한 음식을 먹으면 속도 편하고 소화가 잘 되듯, 이 영화가 그랬다. 편안했고 덤덤히 생각을 소화시키기 좋았다. 허진호 감독님만의 이 담백함이 참 좋다.           




8. 정원이 다림에게     


 누구에게나 이별을 경험하지만, 이렇게 영원한 이별이 나에게 찾아올지 몰랐어. 나에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런 연락 없이 불쑥 떠나버려서 미안해. 너무 보고 싶었어. 병원에 있는 동안 억지로 씹은 밥알들이 돌덩이처럼 느껴질 만큼 마음이 아팠어. 아무것도 아닌 나를, 재미없는 이야기도 귀 기울여 들어주며 나를 좋아해 줘서 고맙다. 너란 사람이 나에게 마지막 사랑이어서 또 이 사랑을 간직하게 해 주어서 참 감사해. 힘든 직업인데도 웃으며 열심히 일하는 모습, 서울랜드에 가고 싶다며 돌려 이야기하던 모습, 불쑥 나에게 찾아오던 모습 다 잊지 않을게. 그 모습 그대로라면 넌 어딜 가든 사랑받을 거야. 장담해. 너와 함께한 여름은 나에겐 크리스마스였어. 아프지 말고 잘 지내.      



          

9. 다림이 정원에게     

 사랑에 빠지는 건 한순간이더라고요. 아저씨가 건넨 아이스크림, 선풍기 바람, 약속 어긴 내게 그저 웃어주는 것, 모두 나를 설레게 했었어요. 불쑥 사라진 아저씨가 너무 미웠지만 또 너무 보고 싶었어요. 혹시나 내 편지가 구겨질까 봐 마음 졸이며 매일 찾아갈 정도로 참 많이 좋아했어요. 제게 여름은 지겹도록 덥기만 한 계절이었는데, 그 해 여름은 특별했어요. 산타처럼 내게 다가와서 행복한 여름을 선물해줘서 고마워요. 나도 이 사랑을 추억에 그치지 않고 간직할게요. 잘 가요 8월의 산타.

매거진의 이전글 플로리다 프로젝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