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결핍 그리고 이별
영화는 조제와 함께했던 시간이 담긴 필름 사진들이 나오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츠네오는 말한다.
“그때가 그립다.”
사진은 기록의 소재이다. 기록은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며, 그리움을 선사해주기도 한다.
츠네오는 사진을 보며 당시를 회상함으로써 이 영화는 그리움에 대해 말할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는 듯했다.
“언젠간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 거야. 베르나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다시 고독해지고, 모든게 다 그래. 그냥 흘러간 1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지.”
츠네오가 조제를 위해 사 온 책 < 한달 후 일년 후> 의 한 대목이다. 불변하는 것은 없다. 예고없이 변화는 찾아온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고 이것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이유이다. 그냥 덤덤히 받아들이기엔 이 사랑은 너무 짙기에 꽉 껴안아버린다. 뜨거운 포옹이 무색하게 사랑은 증발하고 고독함은 흘러간다. 우린 찾아온 고독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곧 찾아올 고독에 대한 기다림을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제는 츠네오 덕에 생애 처음으로 한낮에 산책을 나간다. 들뜬 둘은 유모차를 세게 끌며 달리다 언덕에서 굴러 넘어져버린다. 그때 조제는 구름을 발견한다. 잠시 아픔을 뒤로 한 채, 하늘을 뚫여져라 쳐다본다.
“저 구름도 집에 가져가고 싶어.”
야외활동이 불가능한 탓에 버려진 모든 물건을 집에 몰래 가져와야하는 조제는 작고 동그란 구름 마저도 가져가고 싶어한다. 여기서 조제는 얼마나 은둔한 생활을 해왔는지 알 수 있다. 고개만 들면 볼 수 있는 구름이 조제에게는 특별한 선물이었다. 구름을 닮은 커피 위 휘핑크림이라도 주고 싶을 만큼 조제가 가여웠다.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결핍’이다. 조제와 츠네오에게도 결핍이 나타난다. 외적이든 내적이든 빈틈이 느껴졌다. 조제는 그걸 채워줄 수 없었고 츠네오 또한 그러했다. 개인의 결핍을 완전하게 채워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사랑할 때 가장 위험한 순간은 상대가 나의 모든 것을 채워줄거라 믿는 것이다. 나의 결핍을 스스로 채워나가지 못한다면 그 어떠한 행위도 만족스럽지 못하고 계속해서 갈망하게 된다.
결핍을 해결해주는 치료제가 아닌, 조금 더 나를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비타민. 츠네오와 조제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그렇게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우린 비타민에 만족하지 못했던걸까.
조제의 할머니는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조제와 츠네오 사이에는 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어쩌면 츠네오에게 제발 찾아오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한 이유는 이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츠네오는 슈퍼맨도 나이팅게일도 아니다. 늘 그렇듯, 애초에 자신에게 누군가를 책임질 용기는 없었다는 것은 뒤늦게 깨닫는다. 조제에게도 츠네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이 한계는 조제와 츠네오의 여행에서 크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수족관
먼 거리를 달려와 보려했던 수족관이 문을 닫자 조제는 츠네오에게 떼를 쓴다. 조제를 업고 있는 츠네오는 허무함을 느낄 겨를 없이 조제의 칭얼거림을 버거워한다
유모차
조제의 유모차는 망가져버렸다. 츠네오는 이를 고칠 수 없었고 그 뒤로 조제를 줄곧 업고 다녔다. 츠네오의 등은 넓고 따뜻했다. 좁은 유모차에서 웅크리지 않고 세상을 직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츠네오의 등이 점점 굽어지듯, 그의 무게에도 한계가 있었다.
동생의 질문
조제를 데리고 제사에 오지 않는 형에게 동생은 묻는다.
“자신이 없어진거야?”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츠네오는 조제를 끌어안아버린다. 츠네오는 인정하기 싫음과 동시에 인정해야만함을 알았을 것이다. 그 동안의 한계, 그리고 앞으로의 한계가 한번에 몰려오는 장면이다.
“별로 외롭지도 않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천천히 천천히 시간이 흐를 뿐이지. 난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가지 못할 거야.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진 않아.”
물고기 모텔에 들어간 두 사람. 잠들기 전에 조제가 츠네오에게 한 말이다.
처음부터 몰랐으면 좋았을걸. 몰랐다면 알지도 못했을 감정일텐데. 이제 와서 모른다고 하기엔 츠네오는 조제에게 너무 깊이 스며들어버렸다. 집 안에 있는 물건 하나도 버리고 나면 허전한데, 내 삶의 전부였던 사람이 부재한다면 얼마나 공허할지. 이별이 힘든 이유들 중 하나는 이 외로움이다. 집안 곳곳 비어있는 그 사람의 흔적처럼 내 마음에도 곳곳에 비어있는 그 사람의 자리는 자꾸만 찬바람이 불어와 시리기만 하다. 그렇게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아파하다보면 그런대로 나쁘진 않다고 진심으로 말할 시간이 오겠지.
조제는 깊고 깊은 바닷속, 빛도 소리도 없고 바람도 안 불고 비도 안 오는 정적만 있는 그 곳에서 살았다고 말한다. 그녀의 은둔 생활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 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 깜깜하기만 하다. 츠네오와 헤어진 뒤, 조제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스스로 일상을 보낸다. 서툴지 않고 능숙하다. 조제는 스스로 수면 위에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 문을 열어준 것은 츠네오이다. 츠네오가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조제는 홀로 세상을 이겨내는 방법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조제는 츠네오에게 사랑을 알려주었고 츠네오는 조제에게 세상을 알려주었다.
이 영화가 100퍼센트 좋았다고 말할 수 없다. 섹스파트너, 변태아저씨의 성희롱 등등 성을 가볍게 여기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후배들이 옷을 벗고 선배들의 웃음을 한 몸에 받는 것, 조제와 헤어지자마자 전여자친구를 만나는 츠네오. 이러한 것들은 나의 가치관가 맞지 않았다.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불편함이다.
깊은 바닷속에 살아가던 시절, 나는 수많은 시선을 받으며 살아왔어. 그것은 차갑고도 날카로워 나를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게 만들었지.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나를 끌어안고 수면위로 올려주었어. 새로운 세상이었어. 노랗게 변해버린 책에 적혀있던 글씨가 살아 움직이면서 나의 상상보다 훨씬 아름다운 것들이 내 눈앞에 펼쳐졌어. 나를 수면위로 끌어다준 사람. 그건 바로 츠네오 너야.
하지만 영원히 나를 끌어안고 있기엔 네가 버겁다는 걸 알아. 어쩌면 이미 직감했던 것 같아. 우리에게 한계가 존재하고, 그것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서로에게 끝까지 애를 썼어. 그래도 미안하단 말도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을래. 일상이 그대로 흘러가고 있지만 당장 나는 너무 고독해. 그래서 이 고독이 조용히 흘러갈때까지만 고마워하지도 미안해하지도 않을래. 나에게 세상을 알려준 사람이 내 삶에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그 사실만 오래토록 곱씹을게.
조제. 너의 집에 처음 갔을 때가 선명해. 맛있는 계란말이, 박학다식한 너. 네 곁을 지켜주던 할머니. 모든 것이 따뜻했고 평범했어. 한 여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생성하기 위해 노력했던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사랑이 커지고 자꾸만 생각이 나는 경험을 했어. 때로는 행복하고 때로는 화도 났어. 그렇게 너를 사랑하고 있음을 인정했는데, 그 마음 하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난 오래토록 괴로워하고 자책할거야. 끝까지 이 사랑을 책임지지 못하고 도망가서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도 미안한 마음이야. 그래도 꼭 기억해 줬으면하는 한가지는 조제 너를 향한 모든 것이 진심이었다는 거야. 그것만 기억해줘. 잘 지내 조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