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에 숨겨놓은 그리움
본 내용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등장인물
윤희 : 그리움을 품고 사는 사람. 고등학생 딸 새봄을 둔 엄마. 남편과는 이혼한 후, 새봄과 살고 있다. 지쳐 보이는 얼굴로 매일 봉고차를 타고 공장에 가서 급식소 직원으로 일한다.
쥰 : 그리움을 편지에 담은 사람. 오타루에서 수의사로 일하고 있다. 한국인 엄마와 일본인 아빠가 이혼 한 뒤, 고모와 함께 살고 있다.
새봄 : 윤희의 딸. 그리움을 품고 사는 엄마가 당당히 자신을 마주할 수 있게 도와준다. 엄마가 자신의 모습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마사코 : 쥰의 고모. 오타루에서 카페를 운영한다. 쥰과 가장 의지하는 사이. 쥰이 부치지 못한 편지를 대신 보내준다.
story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던 윤희는 어느 날 마사코에게 온 편지를 받게 된다. 그 편지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딸 새봄. 수능이 끝났으니 눈이 많이 오는 곳으로 해외여행을 가자며 윤희의 그리움이 살고 있는 곳으로 데려간다. 눈이 펑펑 오는 오타루에서 두 사람은 재회할 수 있을까.
쏟아지는 질문, 대답 없는 사람들
학교를 다녀온 새봄은 우편함에 윤희에게로 온 편지를 읽게 된다. 윤희를 그리워하는 내용이었다. 그날 이후, 새봄은 삼촌에게 그리고 아빠에게 윤희에 대해 묻는다. 삼촌은 윤희를 모르고, 아빠는 그저 윤희가 자신을 외롭게 했다고만 한다. 새봄은 집에 돌아와 윤희에게 엄마는 뭐 때문에 사냐고 묻는다. 자식 때문에 산다는 대답에 새봄은 괜히 화만 낸다. 새봄은 윤희가 자신 때문에 무엇이든 참고 살아가는 것 같았다.
편지 속엔 엄마의 그리움이 담겨있는데, 새봄의 쏟아지는 질문에는 아무도 대답이 없다.
편지 속 그리움을 찾아서
새봄은 본인이 직접 그 그리움을 찾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지에 적힌 주소가 오타루라는 것을 알게 되고 윤희에게 눈이 많이 오는 곳으로 여행을 가자고 한다. 그리고 윤희는 매일 타고 가야 하던 봉고차가 아닌 눈과 달, 밤과 고요뿐인 겨울의 오타루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다.
새봄의 첫 인물사진, 윤희
눈 쌓인 오타루를 걷고 있는 새봄과 윤희. 그곳에서 엄마의 새 코트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인물 사진은 왜 찍지 않냐는 삼촌의 질문에 아름다운 것만 찍는다는 새봄은 카메라를 들고 엄마를 찍었다. 새봄의 눈에는 한없이 아름다운 모습이었나 보다. 카메라를 들고 활짝 웃으며 예쁘다고 말하는 새봄의 얼굴에 안도감이 보였다.
너와 하고 싶었던 일들
새봄이 잠든 사이, 윤희는 쥰의 집으로 찾아갔지만 끝내 마주하지 못하고 도망쳐버린다. 여행은 끝나가고 다시 마주할 용기는 여전히 생기지 않는다. 홀로 바에 앉아 바텐더와 이야기하던 윤희는 울먹이며 쥰과 하고 싶었던 것을 마치 이미 일어났던 일처럼 말한다. 산책하고 밥도 먹고 집에 놀러도 가보고. 특별한 것 없이 소소한 일들이 윤희에겐 오랫동안 간절하게 바랐던 일이다. 윤희의 울먹임 속엔 그동안 홀로 꾹꾹 참아왔을 감정이 느껴졌다. 윤희에겐 참 길게 느껴졌을 시간.
쥰의 겨울
수북이 눈이 쌓인 겨울의 오타루에서 살고 있는 쥰. 고모와 오랫동안 함께 살고 있다. 얼마 전엔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해 미워만 했던 아버지를 떠나보내게 되었다. 아버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 사촌 류스케는 한국 남자라도 만나보라며 억지로 사진을 보여준다. 쥰은 화가 났고 휴대폰을 던져버렸다. 세상은 여전히 쥰에게 이성과의 결혼을 강요한다. 그동안 쥰은 자신을 드러내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세상의 시선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가정을 꾸리지도 않았다. 그 경계선을 걸어오던 쥰은 끊이질 않는 시선에 지치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꿈에 나오지 않던 윤희가 어느 날 꿈에 나오게 된 건, 그런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윤희였기 때문이 아닐까.
이해한다는 것
마사코는 유일하게 쥰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가족이다. 어느 날 고모는 쥰을 향해 팔을 벌려 안아보자고 한다. 쥰은 쑥스러워하지만 이내 둘은 오랫동안 서로를 보듬어준다. 그리고 쥰이 윤희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대신 보낸다.
이해한다는 것은 뭘까. 내가 널 왜 이해하는지 설명하는 말보다, 쥰이 직접 편지를 부칠 수 있게 설득하는 것보다 한 번의 포옹과 대신 전한 편지가 상대에게 더 진실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자신을 숨기고 살았을 쥰에 대한 위로와 더 이상은 참지 말라는 격려가 담겨있었다.
무언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앞으로 마사코를 종종 떠올리려 한다.
‘나’의 재회
새봄의 작전으로 쥰과 윤희는 만나게 된다. 둘은 서로를 보며 그 자리에 서서 웃다가 바라보기를 반복한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날이지만, 그들에게는 실감 나지 않을 순간이다. 그렇게 눈 쌓인 길을 함께 걸어간다. 둘의 재회 후, 윤희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한 발자국씩 나아간다. 마사코와 윤희의 재회는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세상의 시선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 마주한 것을 뜻한다. 눈 속에 묻힌 그리움을 꺼내니 알게 된다. 도망치지 말고, 숨기지 말고. 내 시선이 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자신을 위한 삶 아닐까.
겨울과 그리움
<윤희에게>를 보며 <러브레터>가 떠올랐다. 다양한 이유로 두 영화가 비슷한 점이 많지만 ‘겨울’이 배경이라는 것이 내겐 큰 공통점이었다. 겨울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다. 날짜의 수가 커질수록 자꾸만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된다. ‘돌아본다’는 것은 내 눈앞이 아닌 뒤에 머물러 있는 무언가를 보는 것을 말한다. 그리움을 다루는 저 영화는 눈 덮인 새하얀 세상 속 뒤에 머물러있던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 놓으며 선명하게 마주하도록 한다.
짙은 향기
그리움은 향기를 남긴다. 마사코가 지난 사랑을 떠올릴 때, 윤희가 쥰을 떠올릴 때. 모두 그때 그 사람의 향을 언급한다. 코가 가장 빨리 적응하는 것이 향인데, 그 찰나를 오랫동안 기억한다는 것은 얼마나 상대를 사랑했는지, 지금 얼마나 그리워하는지를 말해준다.
“나는 네 꿈을 꿔”
윤희는 답장한다. 나도 네 꿈을 꾼다고.
꿈은 무의식을 지배한다. 서로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단지 지나가는 사랑이 아니었음을, 내겐 큰 존재였음을 뜻한다. 사랑한다, 보고 싶다 라는 말이 아닌 네 꿈을 꾼다는 말을 주고받은 덕에 이 영화가 내게 진한 여운을 줬다.
내겐 어떤 그리움이 살고 있을까.
시선으로부터 도망가버려서 숨기고 있던 그리움이 있을까.
나는 이 영화가 퀴어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윤희가 그리움을 마주하고 자신의 삶을 걸어가는 것처럼 어떤 시선으로부터 억압받거나 도망친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준 것만 같다.
잠시 잊고 있던 내 그리움은 무엇일까. 눈이 펑펑 내리는 날, 그곳으로 나도 달려갈 수 있을까.
영화의 섬세함
새봄이 설거지하는 윤희의 뒤에 앉아서 하고 싶었던 질문을 곱씹으며 고민할 때, 손에 쥐어진 귤에는 흰 실 하나 없이 매끈한 모양이었다. 새봄이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영화 첫 장면에서 윤희에게 온 편지가 우편함에 꽂혀있을 때는 전기 고지서가 함께 들어있다. 전기 고지서를 가지러 가던 새봄이 편지도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설정이었다.
영화 곳곳에 숨어있는 연출의 섬세함이 내가 이 영화를 더 몰입할 수 있게 해주었다.
편지
윤희가 새봄에게
새봄.
엄마가 아닌 윤희의 삶을 발견해준 새봄아.
집에 올 때마다 엄마의 지친 얼굴만 마주했을 너에게 늘 미안한 마음뿐이었는데
이젠 정말 나다운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되었어. 고마워.
살다 보니 우린 많은 걸 숨기고 참으며 살아가야 하더라.
나는 그동안 도망치기만 했고, 나에게 남겨진 건 체념뿐이었어.
이제부터는 너와 함께 고민하며 살아가려 해.
우리에게 앞으로 일어날 새로운 일들을 혼자 감당하지 않고 서로가 힘이 되어주자.
오타루에서 보았던 만월처럼, 앞으로 어떤 구름이 우릴 가려도 다시 차오를 수 있을 거야.
엄마의 꿈속엔 항상 네가 있어. 눈이 오는 겨울날, 다시 여행을 떠나자.
새봄이도 나도 다시 자신을 마주할 수 있게 떠나보자.
눈이 또 언제 오려나.